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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노족(훈족)에 의한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 & 동로마 제국의 멸망 & 흉노족의 헝거리 건설

    흉노족 ( 훈족 )

      흉노족 ( 훈족 )은
      현재는 러시아 땅인 바이칼 호수를 중심으로 중국의 북쪽 지방까지 유목생활을 하던 유목민족이었다.
      단군(檀君)이 나라를 다스렸던 고조선(古朝鮮 : BC 2333년 ~ BC 238년 )때에는 형제처럼 사이좋게 지냈다.

      청동기와 발달된 철기 문화를 가지고 일찍부터 강력한 국가체계를 이루고 있었으며,
      BC 771년쯤 중국의 주(周)나라로 쳐들어와 수도인 호경을 파괴하고, 주나라 12대 왕인 유왕(幽王)을 살해했다.
      흉노족의 침략으로 주(周)나라는 동쪽으로 도망하여,
      낙읍(洛邑, 지금의 하남성 낙양)을 새로운 도읍지로 정하고 평왕(平王)을 새 왕에 앉혔다.

      흉노족이 쳐들어오기 전의 주(周)나라를 서주(西周)라고 하고,
      낙읍으로 수도를 옮긴 이후의 주(周)나라를 동주(東周)라고 한다.

      BC 221년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진시황(秦始皇)도 북쪽의 흉노족은 손도 못델정도로 흉노족은 당시 강성한 국가였다.
      BC 202년 중국에서는 한(漢)나라가 건국되었고, 힘이 강성해진 한(漢)나라는 북쪽의 흉노족을 침략하게 되었는데
      당시 흉노족의 왕(王)이었던 묵특에게 한(漢)나라의 유방 왕(王)이 사로잡히게 되었는데,
      한(漢)나라의 유방은 한(漢)나라의 공주를 대대로 흉노족의 나라에 시집보내겠다고 빌었다고 한다.
      실제 전쟁이 끝난 후 한(漢)나라의 공주를 흉노족의 왕(王) 이었던 선우에게 시집보냈다는 기록도 있다.


<< 고조선 멸망후 가장 큰 영토를 가졌던 훈족의 영토 -- BC 209 년 ~ AD 216 년 >>

      그러다가 고조선(古朝鮮 : BC 2333년 ~ BC 238년 )이 멸망한 후
      고조선과는 형제처럼 가깝게 지내던 흉노에게는
      형제를 잃어 버린 상태에서 혼자서 중국의 한(漢)나라와 싸우게 되었다.

      한(漢)나라 무제(武帝 : BC 141∼BC 87) 때 중국은 주변의 여러 민족에 대한 대규모 군사원정에 성공하였는데
      BC 129년경에 북방의 흉노를 공격하여 흉노의 본거지를 고비 이북으로 격퇴하였다고 한다.

      BC 57 년 흉노는 서흉노와 동흉노로 분열되었고, 분열된 흉노간에 권력다툼의 전쟁이 일어나는데
      동흉노의 <호한야> 선우 ( 흉노에서는 왕(王)을 선우(禪于)라고 했음 )가
      서흉노의 <질지> 선우를 상대로한 전쟁에서 승리하였다.

      전쟁에서 패배한 서흉노의 <질지> 선우는
      일족을 이끌고 우랄산맥을 넘어 탈라스 강 유역에서 아정(牙庭)이라는 나라를 세운다.

      BC 36 년 한(漢)나라의 군대가 서흉노의 <질지> 선우를 추격하여 탈라스 강변에서
      <질지> 선우를 포함한 서흉노의 나머지 무리들을 살해 함으로써 서흉노는 영원히 멸망해 버렸다.

      멸망한 서흉노의 무리집단들은 계속 서쪽으로 이동하여 아랄지역에 도착하는데
      이들이 서유럽 지역에서 흉노의 대제국을 건설하게 되는 시발점이 된다.
      이 시기의 흉노족의 이동을 흉노의 제1차 서천(西遷) 이라고 부른다. -------------------------- BC 36 년

      한편 동흉노는 BC 31 년 <호한야> 선우가 죽고 그의 아들 선우가 되어 나라를 더욱 강하게 만들어 갔다.
      동흉노는 중국의 북쪽지역을 침략하여 태수를 비롯한 수많은 주민들을 살해하고 약탈하자,
      AD 8 년 중국 한(漢)나라에는 왕망(王莽)이 왕(王)이 되어 흉노 정벌에 나섰지만 실패하고
      중국은 광무제 유수(劉秀)가 정권을 잡고 후한(後漢)의 시대로 들어 갔다.

      동흉노는 중국 한(漢)나라와의 외교 문제로 갈등하면서 남흉노와 북흉노로 분열되었다.
      AD 48 년 남흉노의 서역왕(西域王) 일축왕비(日逐王比)가 고비 사막 이남의 8개 집단을 이끌고
      중국 후한(後漢)의 광무제 유수(劉秀)에게 투항하였다.
      후한(後漢)의 광무제 유수(劉秀)는 이들에게 지금의 내몽고 지역을 주면서 그곳에서 살도록 했다.
      남흉노는 이곳에서 차츰 유목생활에서 농경생활로 변하면서 서서히 한족(漢族)과 선비족(鮮卑族)으로 동화되어 갔다.
      이때 후한(後漢) 체제로 동화된 남흉노 사람들은 대부분 투르크 계열의 민족으로 추정한다.

      남흉노가 후한(後漢)에 투항하자
      후한(後漢)에 투항하지 않은 포노(浦奴) 선우가 이끄는 북흉노의 입지도 약화되었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후한(後漢)은 30년간이나 북흉노 정벌의 전쟁을 계속하다가,
      AD 73 년 항복한 남흉노와 연합하여 북횽노를 결정적으로 패배시킨다.
      전쟁에서 패배한 북흉노는 서북쪽인 막북(漠北)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이때 북흉노의 서쪽으로의 이동을 흉노의 제 2차 서천(西遷)이라고 한다. -------------------- AD 73 년

      AD 91 년 후한(後漢)의 화제(和帝)는 다시 남흉노의 도움으로 북흉노 정벌에 나서는데
      이 전쟁에서 패배한 북흉노는 사분오열되면서 일부는 선비족(鮮卑族)에게 예속되었고,
      일부는 천산산맥 북쪽으로 이동하였다가 계속 서쪽으로 이동하여 동유럽쪽으로 이동하였다.
      이때 북흉노의 서쪽으로의 이동을 흉노의 제 3차 서천(西遷)이라고 한다. ---------------------- AD 91 년

      후한(後漢)에 투항한 남흉노는 후한(後漢)이 멸망한 AD 220년부터 차츰 세력을 확장하여
      중국에서 위(魏), 촉(蜀), 오(吳) 나라가 서로 전쟁을 하는 삼국시대(三國時代 : 220년 ~ 280년)을 거치면서 세력을 키워
      중국을 침략하기 시작했다.

      남흉노의 <호주천>선우는 자신의 먼 할머니가 후한(後漢)의 공주였다는 점을 들어
      자신의 성(性)을 후한(後漢) 제국 황제의 성(姓)인 유(劉)로 하면서 후한(後漢)의 전통성을 이어 갈려고 했다.

      304년에는 당시 산서의 태원에서 자리잡고 있던 남흉노의 유연(劉淵)이 <오부>선우가 되었는데
      308년에는 한(漢)나라의 후예라는 명분을 내세워 국호를 북한(北漢)이라고 하고 황제를 칭했다.
      310년에는 유연(劉淵)이 사망하고 아들 유총(劉聰)이 왕위를 계승하였다.
      311년에는 남흉노의 북한(北漢)은 당시 중국 진(晉)나라의 수도인 낙양을 점령해 황궁을 불태웠다.
      312년에는 장안으로 들어가 그곳 인구의 절반을 학살했다.
      316년에는 다시 장안으로 쳐들어가 진(晉)나라를 멸망시키고 중국 중부와 북부 지역전체를 통치하게 되었다.

      진(晉)나라가 멸망한 후의 중국에서는 오호십육국시대(五胡十六國時代 : 316년 ~ 439년)로 들어간다.

      318 년 유총(劉聰)이 사망하자 그의 부관이었던 석륵(石勒)이 권력을 잡고 국호를 전조(前趙)에서 후조(後趙)로 바꾸었다.
      333 년 석륵(石勒)이 사망하고 아들 홍이 왕위를 계승하였다.
      337 년 재상이었던 석호가 왕위를 찬탈하여 왕(王)이 되었다.
      349 년 석호가 사망하자 그의 양자인 장군 석민(石閔)이 후조(後趙)의 정권을 잡는다.

      흉노의 피가 섞이지 않은 석민(石閔)이 왕(王)이 된 후에  
      중국 사람인 한족(漢族)들이 흉노를 포함한 유목민들에게 원한이 많다는 것을 알고
      한족(漢族)들을 충동질하여 흉노족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을 벌이는데
      한족(漢族)들에게 살해된 흉노족이 20만명이 넘었다고 한다.

      선왕(先王) 석호의 아들이면서 왕위를 빼앗긴 석기(石祇)는
      한족(漢族)들에게 살해당한 흉노족의 원수를 갚으려고 흉노족을 규합하여 대항하다가
      석기(石祇)마저 살해당하고 말았다.
      살아 남은 흉노족들은 살길을 찾아 서쪽으로 도망치게 되는데 이것이 흉노의 제 4차 서천(西遷)이라고 한다. --- AD 349 년

      이렇게 4번에 걸쳐 중국으로부터 서유럽으로 도망친 흉노족은 더 이상 중국의 역사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
      하지만 4번째 흉노족이 서유럽으로 이동하여,
      이미 1~3차 서천(西遷)때 서유럽에 도착하여 이곳에 정착하고 있었던 흉노족과 합류하게 되었다.
      이들이 합류하여 375년 서유럽을 공격하게 되었던 것이다.

      흉노족의 서유럽지역의 공격으로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이 시작되었고 유럽은 격변기를 맞이하게 된다.

      375년 서유럽을 공격한 흉노족들은 <아틸라-Attila> 왕(王)이 통치하던 450년경에 최대의 제국을 건설하게 된다
      아틸라(Attila) 왕(王)이 지배한 지역은
      남쪽으로는 도나우 강 남쪽의 발칸 반도,
      북쪽으로는 발트 해안,
      동쪽으로는 우랄산맥,
      서쪽으로는 알프스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점령하고 있었다.


<< 434년 ~ 453년 사이의 아틸라 제국 >>

      흉노족이 건설한 제국의 크기는 세계 역사상
      칭기스칸에 의한 몽고 제국, 알렉산더 대왕에의한 마케도니아 제국에 이어 세번째로 넓은 영토를 점령했다고 한다.

      453년 <아틸라-Attila>가 갑자기 사망하고 난후 흉노(훈) 제국은 붕괴하기 시작하는데,
      469년 <아틸라-Attila>의 아들인 <덴기지크>가 동로마 제국과의 전투에서 패배함으로써 흉노는 역사에서 사라진다.

      참고 : 아틸라 왕(王)

      유럽의 헝가리가 흉노족의 자취를 가장 많이 가지고 있다.
      우선 언어적으로 한글과 유사한 점이 많고, 생활풍습에서도 동양(한국)과 유사한 점이 많이 남아있다

      흉노(훈)족이 유럽 역사에 등장한 시기는 약 100여 년에 지나지 않지만
      흉노(훈)족이 유럽 대륙에 미친 영향은 매우 크다.
      흉노(훈)족의 침입으로 게르만 민족을 포함하여 유럽의 각 민족의 대이동이 이루어졌고
      유럽의 여러 민족들이 이동하여 새로운 곳에 정착하게 되는데 이것이 지금의 유럽 각 국가들의 국경선이 되었다.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

      375년 동유럽지역에 정착하고 있던 흉노(훈)족들은 서쪽으로 진출하기 위해 볼가강을 건너 동고트를 공격하였다.
      동고트 사람들은 서고트로 이동하게 되었고
      서고트 사람(100 만명)들은 도나우 강 남쪽의 로마 영토로 이동하게 되었고,
      378년 서고트족들은 로마와의 전투에서 승리하여 더 많은 서고트족들이 로마의 영토로 이주하게 되었다.
      382년 로마는 도나우 강 남쪽에 정착한 서고트 인들에게 자치를 허용했다.

      반달족은 지금의 독일 지역인 라인강 유역에 살았었는데 흉노(훈)족의 침입으로
      408년 반달족의 <알라리코> 왕이 로마를 공격하여 성공하였으며,
      410년에는 로마를 약탈한 후 자진 철수하여 스페인의 안달루시아 지역에 정착했다
      439년에는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를 점령하고 트리폴리까지 진격했으며
      지중해의 코르시카, 시칠리아, 사르데니아 섬들도 모두 점령했다.

      또 흉노(훈)족에 의해 쫓겨났던 알란족은 피레네산맥으로부터 바다쪽에 걸쳐 에브르 강의 계곡을 따라 정착하고,,
      흉노(훈)족에 의해 쫓겨났던 게르만 민족인 주트와 색슨족은 브리타니아를 점령했으며,,,,
      그 후에 또 다른 게르만 민족인 앵글 족이 브리타니아를 또다시 침략했다.

      흉노(훈)족에 의해 쫓겨났던
      주변의 여러민족 ( 색슨족, 프랑크족, 부르군트족, 수에비족, 반달족, 훈족, 서고트족)들은 서로마 제국을 공격하게 되었는데
      476년에 게르만 민족의 용병 대장 <오도아케르>에 의해
      로마의 마지막 황제인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가 암살되면서 서로마 제국은 멸망하였다.

      이렇게 서유럽은 여러민족들이 새로운 정착지를 찾아 이동을 하게 되었으며
      각 지역에 정착한 민족들에 의해 새롭게 국경선이 정해지고,,,,
      이후 유럽은 중세 봉건제도가 생기기 전까지 약 600년간 암흑의 시대를 보내게 된다.


    실제 살아있는 흉노족의 후예들

      위구르族

        흉노족의 후예로 알려져 있는 위구르族은
        원래 突厥(돌궐 -- 지금의 터키 민족)족의 지배를 받으면서
        세계 최대의 담수호(湖) 바이칼로 들어가는 몽골의 세렌가江 상류지역에서 유목생활을 하고 있었던 민족이었다.
        돌궐 제국이 쇠퇴하자
        만리장성 이북(漢北)지역을 통일하여 744년 부터는 유목민족 국가로서 등장하였다 --- 회흘국(回紇國)

        813년과 866년 두차례에 걸쳐
        위구르족들은 원래의 정착지였던 몽골고원에서 서남쪽으로 이동하여 天山산맥을 넘어
        지금의 신강성 남쪽 타림 분지로 이동했다.
        이곳을 지배하던 티벳족을 내쫓고 이곳에 살고 있었던 이란계의 백인종( 소그드人 )과 혼혈하기 시작했다.

        지금의 위그르 사람들은 하얀 빵모자를 쓰고 있으며,
        얼굴은 중동지역의 사람들을 닮았지만 체구는 한국인 정도였다.
        동양인이 보면, 서양인 같고,,,, 서양인이 보면, 동양인 같다고 할 것이다.
        동양과 서양이 정확하게 50%씩 피를 섞은 종족으로 변해 버렸다.

        당(唐)나라 현종(玄宗)이 경국지색(傾國之色)인 양귀비(楊貴妃)에 빠져 국정을 돌보지 않고 있을 때
        755년 안록산( 安祿山 -- 돌궐족으로 알려져 있음 )이 반란을 일으켜
        756년 낙양(洛陽)을 점령하였고 뒤이어 수도 長安(지금의 西安)까지 점령하였다.
        이때 당(唐)나라는 위구르 군대의 지원받아 안록산의 란을 진압할 수 있었다.

        안록산의 난을 진압한 위구르 군대는 당(唐)나라의 심장부 도시들을 약탈하면서 돌아다녔고,
        당(唐)나라는 공주를 위구르의 왕에게 시집보내고 막대한 금품을 주는 방식으로써 그들을 달래야 했다.
        안록산의 난으로 중국에서는 인구의 반 이상이 죽었으며,,,
        쇠퇴한 당(唐)나라는 150년간을 견디다가 결국 907년 멸망하게 되었고,
        중국은 5대 10국으로 나뉘어져 서로 전쟁을 하는 전란의 역사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흉노(훈)족과 우리 민족과의 관계

      청동솥

        청동으로 만든 대형 솥인데 흉노(훈)족의 상징적인 유물이다.

        청동솥은 흉노(훈)족의 근거지였던 몽골 지역, 북몽골지역, 내몽골지역에서 가장 많이 발굴되었고,
        흉노족이 유럽으로 이동한 지역인 알타이 산맥지역, 볼가 강 유역, 우랄 산맥지역, 헝거리드에서 발견되고,
        중국의 북부 지역인 길림지역과 한반도의 북한지역에서도 발견되었다.

        그런데 청동솥은 김해의 가야시대 고분에서도 출토되었고,
        흉노(훈)족은 청동솥을 말에 싣고 다녔는데
        경주(신라)에서도 말에 청동솥을 싣고 있는 기마 인물상(국보 91호)이 발견되었다.
        흉노(훈)족이 사용했던 청동솥에 그려져있는 문양이
        경주(신라)에서 출토되는 각종 유물에 그려져 있는 문양과 너무나 똑같다.


<< 경주(신라)에서 출토된 기마 인물상(국보 91호)의 모습 >>

      몽골리안 반점

        한국사람들에게 있는 몽골리안 반점이 흉노(훈)족에게도 있었다.

        프랑스의 샹파뉴의 인근에 있는 쿠르티솔 마을의 주민들은 몽골리안 반점을 갖고 있다.
        이 마을은 훈족이 갈리아 지역(프랑스)을 공격한 후
        그들의 근거지인 헝가리의 판노니아로 돌아가지 못한 채 정착한 훈족에 의해 세워진 마을이었다.
        이 마을 주민들도 자신들의 조상이 흉노(훈)족이라고 믿는다.

        프랑스의 랑스 지역도 동양인의 모습을 갖고 있는 주민들이 많이 살고 있는데
        이들도 자신들의 선조가 흉노(훈)족이라고 말한다.


      흉노(훈)의 멸망과 신라, 가야의 건국

        흉노(훈)족이 전쟁에서 패배하고 퇴각하면서 일부의 무리들이 서쪽으로 가지 않고
        동쪽으로 퇴각하여 한반도로 남하하여 신라와 가야를 건국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많다.

        흉노족의 퇴각 시기

          BC 129 년 한(漢)나라 무제(武帝 )가 흉노를 공격하여 흉노가 고비 사막으로 퇴각
          BC 57 년 서흉노와 동흉노로 분열되어 전쟁을 해서 서흉노가 퇴각
          BC 36 년 한(漢)나라의 군대가 서흉노를 공격하여 서흉노 퇴각
          AD 48 년 남흉노가 중국 후한(後漢)의 광무제 유수(劉秀)에게 투항
          AD 73 년 후한(後漢)의 공격으로 북횽노가 퇴각


        신라의 건국시기 : BC 57 년

        가야의 건국시기 : AD 43 년

        경주(신라)에 있는 원형고분군은
        BC 300 년경에 스키타이족을 비롯한 흉노족들이 남긴 왕릉의 무덤과 똑같은 형태를 이루고 있어서
        신라의 왕(王)들이 흉노족의 왕(王)들과의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증명하고 있다.

        역사적인 기록을 보면 신라(경주) 김씨의 시조(始祖)를 김알지(金閼智)라고 말하고 있다.
        밤에 경주 월성(月城)의 시림(始林)에 큰 밝은 빛이 보였다.
        자색 구름이 하늘로부터 땅으로 드리워지고, 황금으로 된 상자(궤)에서 빛이 나오고 있었으며,
        또 나무 밑에서는 흰 닭이 울고 있었으므로 왕에게 알렸다.
        석탈해(昔脫解)왕이 그 숲으로 행차하여 궤를 열어보니, 사내아이가 누워 있다가 즉시 일어났다.
        왕이 궤를 수레에 싣고 대궐로 돌아오는데, 새와 짐승들이 서로 따라와 뛰놀고 춤추었다.
        왕은 그 아이가 금궤에서 나왔다하여 성(性)을 김씨(金氏)로 하였으며, 이름을 알지(閼智)라고 했다.

        왕은 그 아이를 태자로 책봉했으나, 김알지(金閼智)는 왕위를 사양하고 왕위에 오르지 않았다.
        알지는 열한(熱漢)을 낳고, 열한이 아도(阿都)를 낳고, 아도가 수류(首留)를 낳고, 수류가 욱부(郁部)를 낳고,
        욱부가 구도(俱道 )를 낳고, 구도가 미추(味鄒)를 낳았는데,
        미추가 왕위에 오르니 신라의 김씨는 김알지(金閼智)로부터 시작되었다.

        BC 122년 한무제(漢武帝) 때에 곽거병은 감숙(甘肅)지방에 있던 흉노를 공격했다.
        흉노족의 휴도왕(休屠王)은 죽고 휴도왕의 큰아들 일(日, 일제)과 동생 윤(倫)이 어머니와 함께
        한(漢)나라 군사에게 잡혀 포로가 되어 한(漢)나라에 잡혀갔는데
        두 왕자는 운이 좋게 한무제(漢武帝)에게 발탁되어 김(金)씨 성을 하사 받았다.--- 제천 금인(祭天 金人)
        그후 김일제는 한무제(漢武帝)의 경호를 맡을 만큼 신임을 받았다.

        그러나 북방기마민족의 천손임을 자부하는 김일제의 후손은
        왕망(王莽)이 전한(前漢)을 멸하고 신(新 : AD 8 년 ∼ AD 23 년)을 건설하데 적극적으로 도움을 주게 되는데,
        신(新)나라는 15년후에 AD 23년 후한(後漢) 광무제 유수(光武帝 劉秀)에게 멸망하게 된다.

        후한을 세운 광무제는 한(漢)나라를 멸망시키는데 큰 공헌을 한 김일제의 후손들을 철저하게 제거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김일제의 후손들 대부분은 자신의 원래 본거지인 휴도국(休屠國)으로 도주하여
        성(性)을 왕(王)씨로 바꾸고 살았다.
        그중 한갈레가 서쪽으로 두망가지 않고, 동쪽으로 도망하였는데,
        김일제의 5대손인 성한왕(星漢王)이 경주 김씨의 시조인 김알지(金閼智)가 되며
        김일제의 동생인 윤(倫)의 5대손 탕(湯)이 가야로 들어와 김해 김씨 시조인 김수로가 되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많다.

        신라 문무왕릉(文武王陵) 비문에는 신라의 태조는 투후 (秺侯), 성한왕(星漢王)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성한왕은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는 전혀 등장하지 않는 인물이다.
        문무왕의 동생인 김인문의 묘비 역시 신라의 태조는 투후 (秺侯), 성한왕(星漢王)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문무왕릉(文武王陵) 비문에 기록된 << 투후 (秺侯) >>는 누구인가 ?
        중국의 역사서인 한서(漢書)에 의하면
        <<투후(秺侯)>>는 한(漢)나라에 포로로 잡힌 흉노족 휴도왕(休屠王)의 아들인 김일제(金日磾 : BC 134 ~ BC 86 )이다.
        김일제(金日磾)는 한(漢)나라와의 전쟁 과정에서 포로가 되었고
        한무제(漢武帝 : 재임 BC 141 년 ~ BC 87 년 )에 의해 << 투후(秺侯) >>로 임명되었던 실존 인물로 밝혀졌다.  

        또 성한왕(星漢王)에 대해서는
        투후 (秺侯) 김일제(金日磾: BC 134 ~ BC 86 )의 5대손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신라 김씨의 시조인 김알지(金閼智 : AD 56 년 ~ ? )로 보는 사람도 있고,,,,
        김알지(金閼智)의 아들인 김세한(金勢漢)으로 보는 사람도 있고,,,,
        김알지(金閼智) 7세손으로 김씨 중 최초로 왕위에 오른 미추왕(味鄒王 : 재위 262 년 ~ AD 284 년)으로 보는 사람도 있다.

        여러 문헌의 기록과 고고학적 증거들을 종합해 보면
        한반도 남쪽의 신라 사람들의 구성은 여러 민족이 여러 시기에 걸쳐 혼합되면서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 구석기 시대부터 살면서 수많은 고인돌을 남겨 놓은 토착 주민들,,,,

          (2) BC 221년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진시황(秦始皇)의 정복으로 피난온 민족들,,,

          (3) BC 300 년 ~ BC 108 년 사이 고조선의 멸망으로 이주해온 고조선의 유민들,,,,

          (4) BC 129 년 ~ AD 73 년 사이 중국으로부터 넘어온 흉노족의 유민들,,,,

          (5) AD 37년 고구려의 대무신왕의 공격을 받아 멸망한 낙랑국(樂浪國)에서 내려온 사람들,,,


        이렇게 신라는 여러 민족이 모여 세력을 점차 확장해 나가는 외부지향적인 국가로 발전하였던 것이다.
        AD 356 년 내물 마립간이 즉위한 후부터 지금까지 석(昔)씨 임금 시대를 끝내고,
        외부 세력인 김(金)씨가 정권을 장악한 커다란 변화와 함께 신라는 고대국가의 형태를 확실하게 갖추게 되었다.

        이때부터 경주에서는 적석 목곽분(積石 木槨墳)형태의 대형고분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하였고,
        이것은 북방기마민족이 신라지역에 들어와 지배계급이 됐음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활(弓)

        이탈리아의 아퀼레이아( Aquileia )에 있는 크리프타 아프레시 교회의 프레스코화는
        흉노(훈)족이 이탈리아의 로마를 정벌할 때의 그림으로
        추격하는 로마 기병을 말의 안장에 앉은 채 몸을 돌려 화살을 쏘는 장면이 있다.
        이 그림을 보면 고구려 고분벽화인 무용총에서 말을 타고 동물들을 사냥하는 무사들의 사냥 모습과 똑같다.
        이 그림에 나오는 활(弓)은 예맥각궁(복합궁)과 형태가 매우 흡사하며
        같은 시대의 중국 한족(漢族)이나 북방의 스키타이 족 등이 사용하던 활(弓)과는 분명하게 구분된다.

        흉노(훈)족이 사용한 화살촉과 부여, 고구려, 신라, 백제, 가야에서 사용한 화살촉은 똑같은 모양으로
        끝이 넓적하거나 둘 혹은 셋으로 나누어진 도끼날 화살촉을 사용했다.


      무덤

        흉노(훈)족의 전형적인 무덤형태가 적석 목곽분(積石 木槨墳)형태인데,
        경주(신라)에서 발굴되는 왕릉들이 적석 목곽분(積石 木槨墳)형태이고,
        경남(가야)에서 발굴되는 왕릉들도 적석 목곽분(積石 木槨墳)형태이다.

        적석 목곽분(積石 木槨墳)이란 땅을 파고 안에 나무로 통나무집을 만들고,,,
        그 속에 시체와 부장품들을 안치한 후에 위에는 상당히 많은 돌로 둘레를 쌓고 또 그위에 흙으로 덮는 형태인데,
        고구려, 백제, 중국, 일본에는 없는 무덤 형태이다.

        신라 왕(王)들의 무덤에는 누구의 무덤이란 것을 알수 있는 표식이 없다.
        이것은 흉노(훈)족의 풍습과 똑같다.
        흉노(훈)족은 무덤을 만들때 누구의 무덤이라는 것을 알수 있는 표시를 남기지 않았다.
        유럽을 지배한 아틸라왕(王)의 무덤도 어디에 있는지 밝혀진 것이 없다.


      변형두개골 -- 편두(扁頭) -- 납작머리

        아이가 태어나면 긴 돌로 머리를 눌러두어 평평한 머리를 만들고자 했던 풍습이 있었다.
        이런 편두풍습은 고조선 지역에서 나오고,,, 만주지역에서 나오고,,,고대 인도에서도 행해졌었고,,,,터키에서도 나오고,,,
        진한(辰韓)과 변한(弁韓)에서도 그런 풍습이 있었고,,,
        흉노(훈)족의 풍습에서도 나오고,,,,
        김해 ( 가야시대 ) 고분에서도 편두의 두개골이 발굴되었고,,,,
        신라의 왕(王)의 머리 모양에서도 나온다.

        우리 나라에서 경주(신라)에서 출토되는 금관의 크기는
        어린 아이들이 쓸 수 있을 정도로 작은 크기의 금관들인데 어떻게 임금(王)이 사용했을까 ?
        신라의 왕(王)들은 모두 편두(扁頭)형태의 작고 납작한 머리형태를 하고 있었다.

        흉노(훈)족의 고분을 발굴해보면 대부분 편두(扁頭)형태의 작고 납작한 머리형태의 인골을 발굴하게 된다.
        흉노(훈)족이 지배했던 유럽에서도 편두(扁頭)의 풍습이 보인다.


      흉노(훈)족에 의해 건설된 헝거리

        헝거리 언어와 한국어는 유사한 점이 상당히 많다.

        다혈질적이고 성질이 급한 것도 비슷하고, 정이 많은 것도 두 나라 사람들이 가지는 비슷한 민족성이다.
        음악과 춤을 좋아하는 것도 비슷하다.

        현지인들과의 인종적인 혼혈에서 자신들의 핏줄보다는 현지인들의 핏줄이 더많이 혼혈되어
        지금은 순수한 의미에서는 같은 민족이라고 말하기가 어렵지만
        당시 유럽을 지배하고 헝거리를 건설한 흉노(훈)족들은
        비록 소수의 집단이었지만 우리 민족과는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집단이었음에는 분명하다


      흉노(훈)족의 모습

        로마의 기록에 남아있는 훈족의 모습은
        네모난 얼굴에 광대뼈가 튀어 나왔으며, 코는 납작하고, 눈은 옆으로 길게 쭉 찥어져 있었다.
        머리는 납작머리를 하고 있었고, 키는 아주 작은 키였다.

        그리스 기록에 남아 있는 훈족의 모습
        피부색이 어둡고, 눈 대신 어두운 구멍이 두 개 나 있고, 코는 납작하고, 뺨에 상처가 있다 라고 기록하고 있었다.

        그리스인 <프리스코스>가 묘사한 아틸라의 모습은
        몸집이 작고 가슴이 넓고 머리가 컸다. 눈은 가늘게 찢어졌고 코는 납작했고 광대뼈가 튀어나왔으며
        숱이 적은 턱수염을 갖고 있었다. 라고 말했다.

        중국의 기록에 나오는 흉노족의 모습
        신체는 작지만 땅땅한 편이고, 머리는 아주 크고 둥글며, 안면은 넓고 광대뼈가 튀어 나왔다.
        머리카락은 전부 잘라 겨우 정수리에만 남아 있다.
        눈썹은 짙고 눈동자는 불타듯이 강렬하며 눈은 째진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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