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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 왜곡 - 동북공정(東北工程)의 허구성

      중국이 주장하는 동북공정(東北工程)이란

        중국의 입장에서
        대한민국(한민족)은 한반도 남부에 있었던 마한(馬韓) 진한(辰韓) 변한(弁韓)의 3한(三韓)의 후예로 생각하고,
        한반도 북부지역으로부터 중국의 문화권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고조선과 고구려는 평양을 중심으로 한 한반도 북부에 있었다.
        그래서 중국은 동북공정(東北工程)을 통해 한반도 북부를 그들이 장차 회복해야할 영토라고 주장하고 있다.

        중국은 단군 조선( 고조선 )은 실재로 없었다고 주장하고,,,
        기자 조선은 중국의 주(周)나라의 무왕이 조선왕에 봉한 인물이니 기자조선의 역사는 중국 역사의 일부이고,,,
        고구려는 한4군(漢四郡)의 하나인 현도군에서 일어난 왕국이니 고구려도 중국의 변방정권 중의 하나라고 주장한다.

        중국은 한국 민족의 활동 무대는 한강 이남이어야 한다는 것이
        동북공정(東北工程)을 펼치는 중국측 주장의 핵심이다.


      동북공정(東北工程)의 허구성

        오늘날 중국에서는 정부차원에서 동북공정(東北工程)이라는 이름으로
        지금까지의 중국 중심의 역사로 바꿀려고 하고 연구 노력하고 있는데 이것은 엄청난 허구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진실은 바꿀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가만히 두어도 진실그자체 대로 나타난다.
        그런데 지금 중국에서는 그 역사적인 진실이 밝혀지는 것이 두려운 것이다.

        그 진실이 밝혀지면 민족적인 가치성을 상실하게되어 중국은 엄청난 재앙의 시대로 들어 가게 되어 있다.
        그래서 그들은 어거지로 역사를 왜곡하고 있는데
        한국과 주변국에서는 정부와 역사 학자들은 아니라고 맞대응을 하고 있는 실정이다.

        나는 중국이 동북공정을 하도록 그대로 한참을 내 버려두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거짓말을 하다보면 또 다른 거짓말을 하게 되어 있다.
        더 많은 거짓말을 하도록 놔둔 후에 진실이 밝혀지면 중국은 가만히 두어도 자멸하는 단계까지 간다.

        중국땅을 중국사람인 한족(漢族)이 다스린 시기보다는
        중국사람이 아닌 이민족 ( 한국사람/만주족/여진족/거란족 )이 중국의 한족(漢族)을 다스린 시기가 더 많다보니.
        피지배계급이었던 시기의 역사도 자기 것이라고 우길수도 있겠지만,,,
        이것을 자랑스럽게 이야기 하지는 못할 것인데
        자랑스럽지 못한 역사를 자랑스러운 역사로 만들려고 하다보니 억지 춘향놀음을 해야 하고,,,
        거짓말을 해야하고,,,,동북공정이라는 어슬픈 역사 왜곡도 해야 하는 것이다.

        중국의 입장을 이해를 못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 방귀 낀 놈이 성을 먼저 낸다 >>고 ,,, 그런 어리석음을 저지르는 중국사람들이 애처롭구나.

        허구성(1) : 중국의 역사시대를 시작한 사람들은 중국사람들이 아닌 한국사람(동이족) 이었다.

        허구성(2) : 당시 중국사람들은 자신을 지킬려고 만든 만리장성이라는 증거물이 있다.

        허구성(3) : 고인돌의 유적

        허구성(4) : 신석기 유물과 청동기 유물의 분포도를 보면 발달된 문명은 남쪽(중국)이 아닌 북쪽(고조선)에 있었다.

        허구성(5) : 중국 황허(黃河)문명보다 앞선 요하(遼河)문명이 있었다.

        허구성(6) : 한자(漢字)는 중국사람들이 만든 것이 아니고 한국 사람(동이족)들이 만든 것이다.

        허구성(7) : 중국을 통치한 민족은 대부분 남방의 중국사람들이 아닌 북방의 동이족이었다.

        참고 : 중국(中國)의 실수 -- 동북공정(東北工程) -- 한국(韓國)의 기회


      삼황오제

        결론 : 옛날에 중국을 다스린 삼황오제는 중국사람이 아니라 한국사람(동이족) 이었다.

        중국인들이 자랑하는 삼황 오제
        삼황은,,,,,복희(伏羲), 여와(女娲), 신농(神農)
        오제는,,,,,황제(黃帝), 전욱(颛顼), 제곡(帝喾), 당요(唐堯), 우순(虞舜) 

        태호 복희(BC3528∼BC3413)는
        배달국(倍達國)의 환웅(桓雄) 시대때 5대 태우 환웅(桓雄)의 12번째막내 아들로 태어난
        우리나라 민족 ( 동이족/東夷族 ) 이었던 것이다.
        태호복희
        (伏羲)가 우리나라 사람이었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는 것은
        한국의 역사책 뿐아니라 중국의 역사책에서도 그렇게 기록되어져 있다

        또 BC 2700 년경에 배달국의 14대 환웅(桓雄)이었던 치우천황(蚩尤天皇)과 10년에 걸쳐서 전쟁을 치룬
        오제(五帝)의 첫 번째 임금인 황제(黃帝)도 동이족(東夷族) 이었고,
        요(堯), 순(舜) 임금까지 모두 동이족(東夷族) 이었다는 사실이 역사서에 기록되어져 있다.

        참고 : << 치우천황(蚩尤天皇)과 중국 황제(黃帝)의 탁록전투 >>


      중국의 고대 국가 시대

        하 (夏)왕조 ( BC 2070 ~ BC 1766 )

          삼황오제가 동이족이었는데 그 후손이 세운 나라도 동이족이 다스린 나라이었다.


        은 (殷)왕조 ( BC 1766 ~ BC 1027 ) / 상(商) 왕조

          실제 유물과 유적들이 많이 발굴되어 은(殷) 나라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왕조이다.

          중국의 역사책 중에 가장 유명하고 정통의 역사서로 인정받는 책이
          바로 << 사마천 >>이라는 사람이 쓴  << 사기(史記) >> 라는 역사책입니다.
          이책에서 << 은(殷)나라는 동이(東夷)족의 나라이다. >> 라고 합니다.


        주(周) 왕조 ( BC 1122 ∼ BC 256 )

          중국의 서쪽지역에서 세력을 구합하한 주문왕 (周文王)은 주(周)나라를 세우고
          그리고 그 아들인 주무왕 (周武王 ; BC 1169 ~ BC 1116 ) 은(殷)나라 멸망시키고,
          그리고 지금의 산시성(陝西省) 시안(西安) 부근-- 당시의 호경(鎬京) -- 에 도읍을 정했다.

          주(周)나라의 지배계층은 선비(鮮卑)족이었다.


      공자(孔子)는 한국사람이었다.

        공자 (孔子 ; BC 552년 ~ BC 479 년 )

        공자(孔子)는 은(殷)왕족의 혈통을 이어 춘추전국시대 말기인 BC 552년에
        지금의 중국 산동성(山東省) 곡부 (曲阜) -- 춘추전국시대 당시에는 노(魯)나라 --- 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의 성은 숙량(叔梁), 이름은 흘(紇)이며,,,,어머니는 안씨(顔氏) 집안으로, 이름은 징재(徵在)이다.
        아버지는 제(齊)나라와의 싸움에서 군공(軍功)을 세운 부장(部將)이었으나,
        공자가 3세 때 별세하여 공자(孔子)는 가난한 생활을 하면서 자랐다.

        중국의 역사책 중에 가장 유명하고 정통의 역사서로 인정받는 책이
        바로 << 사마천 >>이라는 사람이 쓴  << 사기(史記) >> 라는 역사책이다.
        이책에서 << 은(殷)나라는 동이(東夷)족의 나라이다. >> 라고 합니다.
        또 공자(孔子)는 자기 스스로 << 나는 은(殷)나라의 후손이다 >> 이라고 말했습니다.

        은(殷)나라가 망하고 주(周)나라가 세워진 뒤, 공자가문은 7대에 걸쳐서 주(周)나라에서 벼슬을 하지 않다가,
        7대가 지난 후부터 주(周)나라 관직의 벼슬길에 나오게 되었으며, 그 10대손이 공자(孔子) 이다.

        은(殷) 나라 ( BC 1766 년 ~ BC 1027 년 )
        주(周) 나라 ( BC 1122 년 ~ BC 256 년 )
        춘추전국시대 ( BC 770 년 ~ BC 221 년 )

        또 공자가문의 족보에는 이렇게 쓰여져 있습니다.
        << 장백산에서 날아온 학이 곤륜산에서 노닐던 암사슴과 만나, 그 사이에서 나온 사람이 공자다 >>
        백두산 지역에서 살았던 동이(東夷)족이었던 공자의 아버지와
        중국의 한족(漢族)출신의 어머니 사이에 태어난 것이 공자(孔子)라는 말이다.

        즉 공자는 동이(東夷)족의 후예라는 말이다.


      청동기/철기 문화

        석기시대를 지나고 청동기 시대를 접어들 때의 유적지를 보면
        청동기/철기 문명은 우리나라민족이 먼저 한 것을 중국 사람들에게 가르켜준 것이다.

        참고 : << 고인돌 >>


      중국의 한자(漢字)

        중국의 한자(漢字)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만든 것이다.
        중국의 지식인들은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다.

        참고 : << 잃어버린 우리의 글 ( 녹도문자, 가림토 문자, 갑골 문자, 한자 ) >>

        어떤 민족이나 집단의 문화 공동체는 말과 언어 그리고 문자를 함께 사용함으로써 이루어진다.
        또 말과 글(문자)을 놓고 이야기하자면 당연히 말이 있은 다음에 글(문자)가 만들어 지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과 중국은 땅이 연결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간에 말과 글(문자)이 서로 달랐다.

        여기서 중국과 대만 학자들이 연구한 고대 중국어의 발음에 대해서 몇가지 사실을 밝혀보면 다음과 같다.

        우리나라 말인 <바람>의 경우
        한자(漢字)로는 풍(風)이라고 하는데, 오늘날 중국에서는 <펑(feong)>이라고 발음한다.
        그런데 옛날 중국의 발음은 <프람>이었고, 옛날 한국의 발음은 <파람>이었다.
        옛날 고조선 시대 우리나라 사람이 <파람>이라는 말에 대한 문자를 풍(風)이라고 만들어 사용했는데,
        당시 중국사람들이 발음을 <프람>이라고 하였고 오늘날에는 <펑(feong)>이라고 발음하게 된 것이다.

        또 다른 예를 들면
        우리나라 말의 <나> 의 경우는
        한자(漢字)로는 아(我)이라고 하는데, 오늘날 중국에서는 <워(wo)>이라고 발음한다.
        그런데 옛날 중국의 발음은 <나(Nah)>이었고, 옛날 한국의 발음은 <나>이었다.
        옛날 고조선 시대 우리나라 사람이 <나>이라는 말에 대한 문자를 아(我)이라고 만들어 사용했는데,
        당시 중국사람들이 발음을 <나(Nah)>이라고 하였고 오늘날에는 <워(wo)>이라고 발음하게 된 것이다.

        또 다른 예를 들면
        말(馬), 강(江), 산(山), 근본(本), 등등 많은 한자 말이 우리나라 말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알수 있다.

        위의 예에서 보듯이
        현재 중국에서 사용하는 글자에 대한 고대 중국의 발음이
        한국말의 발음과 아주 유사하다는 것을 쉽게 발견 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한자(漢字)의 고대 중국의 발음이 한국어에서 시작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며,
        한자(漢字)는 한국 사람이 만들었으며 처음부터 한국말을 표현하는 문자로 시작했다는 것이다.

        한자(漢字)로 표현된 문자의 고대 발음체계가 한국말의 발음체계와 같다는 사실에서
        한자(漢字)를 만든 민족이 우리나라 사람이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중국 사람, 한족(漢族)이란

        한족(漢族)을 인종적으로 구분한다면
        중국 동쪽의 해안지대와 황하강 양자강 주변의 중국 본토에서 옛날부터 살아온 사람들이라고 해야 할겁니다.

        그런데 실제 중국에 가보면
        키가 작고 피부가 까무잡잡한 양자강 남쪽의 중국인 즉 광동인(廣東人) 이 있고,
        키가 크고, 등치도 크고, 얼굴이 네모진 형태의 황하강 북쪽지역의 중국인 즉 화북인 (華北人) 이 있는데,
        종족이 틀리는 것 같은 이 두 집단이 모두 한족(漢族) 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중국이 말하는 한족(漢族)이라 하는 개념은
        인종적(人種的)인 구분이 아니라 문화적(文化的)인 구분으로 보아야 한다.

        한족(漢族)을 문화적인 개념으로 구분한다면
        한족(漢族)들이란 이름에서 보듯이 중국의 한(漢)나라 이후 중국 중원(中原)에 살았던 사람들이
        민족적인 동질성과 문화적인 동질성으로 만들어진 개념으로 봐야한다.


      진시황(秦始皇)은 누구인가 ?

        중국의 역사는 삼황 오제 ( 三皇 五帝 ) 시대를 거쳐,,,,
        하 (夏)왕조 ( BC 2070 ~ BC 1766 ) 시대,,,
        은(殷) 나라 ( BC 1766 년 ~ BC 1027 년 )
        주(周) 나라 ( BC 1122 년 ~ BC 256 년 ) 시대에 이르게 된다.

        이 주(周) 나라 시대때 주(周) 나라의 제후국으로 출발한 지방세력들이
        주(周) 나라가 약해진 틈을 타서 독립적인 국가로 발전하여 서로 싸우면서 전쟁을 하였던 시기를
        춘추 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 : BC 770년 ~ BC 221 년 ) 라고 하는데
        이중에서 강력했던 나라들을 보면 진(秦), 조(趙), 위(魏), 한(韓), 제(齊), 연(燕), 초(楚) 의 7개 나라가 있었다.
        이들 7개의 나라를 전국 칠웅(戰國七雄)이라고 부른다.

        주(周)나라의 지배계층은 선비(鮮卑)족이었다.
        주(周)나라의 왕(王)으로부터 봉작을 받아 서안(西安)지역에서 주(周)나라의 제후국으로써 통치자가 되어
        BC 845 년에 진(秦) 나라를 건설한 사람인 진중(秦仲) 또한 한족(漢族)이 아닌 선비(鮮卑)족이었고,
        그의 후손인 진시황 (秦始皇)도 당연히 한족(漢族)이 아닌 선비(鮮卑)족 출신이었던 것이다.

        진시황 (秦始皇 : BC 259 년 ~ BC 210 년)은
        진(秦) 나라 ( BC 845 년 ~ BC 221 년 ~ BC 206년 ) 장양왕(莊襄王)의 아들로 태어나서
        아버지인 장양왕이 죽게 되자 13세 어린 나이로 BC 247 년 진(秦)나라의 제 34대 왕(王)에 즉위하였다.

        23세의 나이때 ( BC 237 년 ) 부터인 실질적인 왕(王)으로써 업무를 수행했으며,
        BC 230 년 가장 세력이 약했던 한(韓) 나라를 멸망시키고
        BC 228 년에는 조(趙) 나라를 멸망시키고,
        BC 225 년에는 위(魏) 나라를 멸망시키고,
        BC 223 년에는 세력이 가장 강성했던 초(楚) 나라를 멸망시키고,
        BC 222 년에는 연(燕) 나라를 멸망시키고,
        BC 221 년에는 마지막 남은 제(齊) 나라까지 멸망시키고 39세의 나이에 중국을 통일하였던 것이다.

        이때부터 중국에서 사용되던 화폐가 통일되었고, 문자(文字)도 통일하였으며
        도로 역시 정비하여 각지의 교통체계를 정비 하였으며, 중앙 집권적인 전제 군주국가를 확립하였다.

        BC 213 년에는 봉건제를 주장하는 학자들이 못마땅하여 학자들이 읽는 책을 모두 태워버렸다 ---분서(焚書)
        BC 214 년에는 불로장생 약을 구하는 것을 반대하는 학자들을 460명이나 모두 죽여 버렸다. --- 갱유(坑儒)

        진시황제는 북방에 흉노의 침입을 염려하여
        서쪽으로 임도로부터 동쪽으로 요동까지 그 유명한 만리장성(萬里長城)을 쌓도록 명했다.
        이 만리장성에 동원된 인부가 150 만여 명이나 되었고, 공사중 죽은 사람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고 한다.

        또 70 만명의 인부를 동원하여 궁궐을 새로 만들고, 자신의 능묘를 건설하도록 했다.

        BC 210 년 진시황제는 지방을 순행하는 동안에 50세의 나이로 객사하고 말았다.
        그의 시신은 자신이 만든 지하 궁전인 여산에 묻혔다. --- 진시황릉
        이 무덤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대규모 부장품인 병마용(兵馬俑 : 군인, 말 모양의 인형)이 발굴되었는데,
        진시황의 것이라고도 하고,,,,, 아니라고도 한다.

        BC 210 년 진시황이 죽게 되자
        전국 칠웅(戰國七雄)의 나라들이 다시 일어나게 되는데
        한(漢)나라를 표방하는 유방(劉邦)과 초(楚)나라를 표방하는 항우(項羽)가 서로 싸우게 된다 ---- 초한지(楚漢志)

        BC 206년 진시황의 아들이 다스리던 진(秦) 나라는 유방(劉邦)에게 항복하고 멸망하였다.

        그리고 BC 202 년 항우(項羽 : 선비족 / 鮮卑族 )가 유방(劉邦 : 한족 / 漢族 )에게 패하고 자결함으로써
        중국은 다시 통일되었으며 한(漢)나라의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오늘날 우리가 중국을 차이나(China) 라고 부르게 된 것은 바로 진시황이 세운 진(秦)나라에서 유래된 것이다.

        그런데 진시황이 중국사람이 아니라 한국사람이었다는 책이 있다.
        미국에 거주하는 중국인 물리학자인 주쉐이위안 (朱學淵) 이라는 사람이 쓴 책의 제목이
        << 진시황 (秦始皇)은 몽골어를 말한 여진인(女眞人) 이었다 >> 이다.
        중국 사람들도 진시황 (秦始皇)을 중국사람이 아닌 동이족(東夷族)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 만리장성의 지도 -- 춘추전국시대때부터 있었던 성들을 진시황이 연결하여 만리장성을 건설하였다 >>

      만리장성을 넘나들면서 벌인 전투

        연(燕)나라의 고조선(古朝鮮) 침략

          중국이 춘추 전국시대때에 중국 북쪽에 있었던 나라가 연(燕)나라인데
          연(燕)나라의 소왕(昭王: BC 311 년 ~ BC 279 년 ) 시절에
          진개(秦開)라는 장수가 약해진 고조선(古朝鮮)을 침략하기 위해
          만리 장성을 넘어 고조선의 중심부인 요하(遼河)강 지역까지 침략해 들어 간적도 있었다.


        전한(前漢)의 고조선(古朝鮮) 침략

          BC 108년 전한(前漢)의 무제(武帝)는 고조선(古朝鮮)의 마지막 혈통인 위만조선(衛滿朝鮮)을 멸망시키고
          그곳에 한사군 (漢四郡)을 설치하였다.


        후한(後漢)의 고구려(高句麗) 침략

          AD 28년 후한(後漢)의 군대가 고구려를 침략했으나 실패하였다.
          AD 37년 고구려가 후한(後漢)의 지배에 있던 낙랑을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AD 172년 후한(後漢)의 군대가 고구려를 침략했으나 고구려군에 의해 전멸 당하였다 --- 좌원(坐原)대첩


        중국의 위,촉,오나라가 각축을 벌이던 삼국시대때에 위(魏)나라의 고구려 침략

          246년 위(魏)나라의 관구검이 고구려를 침공하였다.
          259년 위(魏)나라의 위지해(尉遲楷)가 고구려를 침공하였으나 대패하였다.

          2차례에 걸쳐 고구려 침략에 실패한 위(魏)나라는 고구려의 남침에 대비하여 만리장성을 쌓았다.


        중국의 5호 16국시대때 선비족(鮮卑族)의 고구려 침입

          293년 선비족(鮮卑族) 모용부(慕容部)의 부족장이었던 <모용외>가 고구려를 침입하였으나 실패하였다.
          296년 <모용외>가 고구려를 다시 침입하였으나 또 실패하였다.


        고구려의 중국 침략

          313년 고구려(高句麗)가 낙랑군과 대방군 점령
          317년 고구려(高句麗)가 현도군을 점령


        중국의 5호 16국시대때 전연(前燕)의 고구려 침입

          342년 전연(前燕)의 모용황(慕容皝)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고구려를 침략


        중국의 5호 16국시대때 후연(後燕)의 고구려 침입

          385년 고구려가 후연(後燕)의 요동(遼東)지역을 공격하여 요동과 현토를 쳐부수고 포로 1만 명을 생포하였다.

          400년 후연(後燕)이 고구려를 공격하여 요동(遼東)지역을 탈환했다.
          402년 고구려가 요동(遼東)지역과 요령성 조양시(遼寧省朝陽市) 지역을 다시 탈환
          406년 후연(後燕)의 모용희(慕容熙)가 고구려의 요동(遼東)지역을 공격했지만 실패했다.


        수(隋)나라의 고구려 침입

          598년 수(隋)나라는 30만 대군을 동원하여 고구려를 침략하였지만 5만의 고구려군에 대패하였다.
          612년 수(隋)나라의 왕(양제)이 직접 군사 113만명을 거느리고 고구려를 침략하였으나 실패하고 퇴각하였다.
          613년 수(隋)나라의 왕(양제)이 직접 고구려를 침략하였으나 또다시 실패하였다.
          614년 수(隋)나라의 왕(양제)이 직접 고구려를 침략하였으나 또다시 실패하였다.

          618년 수(隋)나라 멸망


        당(唐)나라의 고구려 침입

          642년 당(唐)나라의 군대가 만리 장성을 넘어 고구려를 침략하였으나 고구려의 <연개소문> 장군이 막아냈다.
          645년 당태종 이세민이 직접 30만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범하지만
          안시성에서 <양만춘> 장군에게 처참하게 패하였다.
          649년에 당태종 이세민(唐太宗 李世民)이 세상을 떠난다. -- 고구려 침략을 중지하라고 유언을 함

          668년 고구려(高句麗) 멸망


      만리장성 ( 萬里長城 ) 의 의미

        만리장성을 허물고 없애지 않는 이상
        중국이 역사를 왜곡하는 것은 결국 자신의 거짓말을 탄로가 나게되어 있다.

        사람이 담을 쌓는 이유는 자신을 외부의 적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
        그리고 담을 쌓는 위치는 자신이 지키고자 하는 곳까지만 담을 쌓는다...
        또 담을 쌓는다는 것은 담밖에는 자신보다 더 강한자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세계 7대 불가사이한 일로써 기록되어져있는 만리장성(萬里長城)은 중국인들도 스스로 자랑이 대단하다.
        그렇게 자랑하는 소리를 듣고난 후 다음과 같은 질문을 중국인에게 던져 보십시요.
        그리고 중국사람들이 뭐라고 설명하는지 한번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1) 만리장성을 왜 쌓았느냐 ?
          (2) 경계선을 만들려면 나라의 변방에 만들어야지, 너희들은 만리장성을 왜 너희 나라 한가운데 쌓았느냐 ?
          (3) 왜 100년 200년 도 아니고 4000년동안 쌓았느냐 ?
          (4) 담밖에 있는 무엇이 그렇게 겁이 나서 담을 쌓았나 ?


        중국의 역사와 함께 중국 사람 ( 漢族 ) 들은 계속 담을 쌓아 왔음을 알수 있다.
        길이도 길었지만 산속에서 쌓는 것이니 쌓는데 얼마나 힘들었겠는가?
        그리고 그렇게 미련할 정도로 힘들게 쌓았던 이유는 그들의 영역을 빼앗기지 않고 지키고자 함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
        담 밖의 다른 민족들을 쉽게 이길수 있다면 그런 담을 쌓았을 이유가 없었다.
        담 밖에는 이길수 없는 강력한 다른 집단들이 있어서 자신들을 계속 괴롭혔다는 증거이다.
        힘으로는 이길수 없으니 담이라도 쌓아서 지킬수 있도록 해보자는 것이 중국 사람들의 심정이었던 것이다.
        그것도 4,000년동안이나,,,,

        그런데 지금 중국이 말하는 동북공정은
        담안도 내것이고,,,,,, 담밖도 내것이고,,,,, 담안의 역사도 내것이고,,,, 담밖의 역사도 내것이다.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

        100년 200년도 아닌 4,000년동안 이담(만리장성) 밖깥쪽은 우리땅이 아니라고 하면서
        제발 이담을 넘어 침략해오지 말라고 담(만리장성)을 열심히 쌓아놓고
        이제와서는 담(만리장성)밖에 살았던 고구려와 발해가 자기들 조상이라고 우긴다,,,
        거짓말을 할려면 담(만리장성)부터 없애고 해야지,,,,
        증거가 그냥 남아 있는데 그렇게 우기면 바보 취급 받는다.

        이것은 미국에 살고 있는 백인이
        옛날 인디언들이 바위에 그려놓은 그림을 보고
        저 그림은 미국의 영토 안에 있는 것이니 우리 백인들의 역사라고 말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


<< 만리장성의 모습 >>

      만리장성 ( 萬里長城 ) 쌓기

        중국의 옛날 역사를 보면 만리장성의 역사를 알수 있다.

        중국 역사에서 가장 먼저 나오는 것이 삼황오제 ( 三皇五帝 )인데,
        삼황오제 ( 三皇五帝 ) 의 첫 번째 임금인 태호 복희(BC 3528 년 ∼ BC 3413 년 ) 임금 시대 때부터,,,,
        그리고 전설속의 왕조인 하(夏)왕조 ( BC 2070년 ~ BC 1766년 ) 시대,,,,,,,
        갑골문자와 실제 유물이 나오는 은(殷)나라 ( BC 1766 년 ~ BC 1027 년 ) 시대,,,,,,,
        주역을 만들었다는
        주(周) 나라 ( BC 1122 년 ~ BC 256 년 ) 시대,,,,

        공자(孔子)가 출현하는 춘추전국시대 ( BC 770년 ~ BC 221 년 ) ,,,,,,,
        진시황(秦始皇)이 중국을 처음으로 통일한 진(秦) 나라 ( BC 221년 ~ BC 220 년 ),,,,
        평민 출신 유방이 호족 출신 항우를 무찌르고 장안(시안)을 도읍으로 건국한 한(漢)나라( BC 202 년 ~ AD 220 년)시대

        한(漢)나라 멸망 후 중국은 삼국지에 나오는 위,촉,오 나라가 서로 다투는 三國時代( 220 년 ~ 280 년 )를 거치고,
        서진(西晉)과 동진(東晉)으로 구분 되는 진(晉)나라 시대 ( 265 년 ~ 317 년 ~ 420 년 )
        5호 16국 시대 ( 304 년 ~ 439 년 ) 과 魏晉南北朝時代 ( 439 년 ~ 589 년 ) 라고 불리는 大혼란기를 맞이한다,

        이러한 혼란기를 정리하고 400 년 만에 중국을 통일한 선비족(鮮卑族)에 의해 건설된
        수(隋)나라 ( 581 년 ~ 618 년 ) --- 선비족(鮮卑族)에 의해 건설된 나라
        당(唐)나라 ( 618 년 ∼ 907 년 ) --- 선비족(鮮卑族)에 의해 건설된 나라

        송(宋)나라 ( 960 ∼ 1127  : 南宋 1127 ∼ 1279 )
        요(遼)나라 ( 907 ∼ 1125 )  ---- 몽골-투르크계의 거란족(契丹族)이 세운 나라
        금(金)나라 ( 1115 ∼ 1234 ) ---- 여진족(女眞族)이 세운 나라

        원(元)나라 ( 1271 ∼ 1368  : 北元 1368 ~ 1635 )  ---- 몽골족이 세운 나라
        명(明)나라 ( 1368 ∼ 1644 ) ---
        청(淸)나라 ( 1616 ∼ 1912 ) ---- 만주족 -- 여진족(女眞族)이 세운 나라

        BC 2700 년경의 중국의 황제(黃帝)때 만리장성 쌓기 시작

          중국인들이 자랑하는 삼황 오제 중에서 오제의 첫 번째 임금인 황제(黃帝)때인 BC 2700 년경에
          지금의 중국 북경지방(하북성)의 탁록이라는 곳에서
          배달국의 14대 환웅(桓雄)이었던 치우천황(蚩尤天皇)과 10년에 걸쳐서 전쟁을 치룬다.

          전쟁은 치우천황(蚩尤天皇)의 일방적으로 승리로 끝나고,
          중국의 황제(黃帝)는 항복을 한다.


        춘추 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 --- 연(燕)나라 ( BC 1100 년 ~ BC 221 년 )에 의한 장성 쌓기

          주(周) 나라의 건국 공신 출신이었던 소공(召公) 에 의해 주(周) 나라의 제후국으로 출발한 연(燕)나라는
          주(周) 나라가 약해진 동주(東周 : BC 771 년 ~ BC 256 년 ) 시대에는 독립적인 국가로 발전하였다.

          당시 연(燕)나라의 북쪽에는 고조선(古朝鮮)이 있었는데,
          고조선(古朝鮮)으로부터 침략에 자신들을 방어할 목적으로 장성을 쌓기 시작했으며
          춘추 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 : BC 770년 ~ BC 221 년 )에는
          주변국들로 부터의 침략을 방어할 목적으로 장성을 쌓았던 것이다.

          고고학자들의 발굴조사에 의하면
          BC 299 년경에 흙벽돌과 돌로 축조된 연장성(燕長城)에는 초소와 봉화대가 있었다고 한다.
          장성은 조양(造陽)에서부터 시작하여 양평(襄平)까지 이르렀다
          이들이 당시 성(城)을 만든 것은
          북쪽의 고조선(古朝鮮)과 남쪽의 진(秦), 조(趙), 위(魏), 제(齊) 나라들과의 전쟁을 위해서 만든 것이다.

          연(燕)나라의 고조선(古朝鮮) 침략

            한때 강성해진 연(燕)나라의 소왕(昭王: BC 311 년 ~ BC 279 년 ) 시절에는
            진개(秦開)라는 장수가 약해진 고조선(古朝鮮)을 침략하기 위해
            만리 장성을 넘어 고조선의 중심부인 요하(遼河)강 지역까지 침략해 들어 간적도 있었다.


        춘추 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 --- 조(趙)나라 ( BC 403 년 ~ BC 228 년 )에 의한 장성 쌓기

          춘추시대 진(晉)나라에는 위(魏)씨, 조(趙)씨, 한(韓)씨 3명의 귀족이 있었는데,
          이들 3 사람이 진(晉)나라를 3분하여 각각 위(魏)나라, 조(趙)나라, 한(韓)나라를 세웠다.
          그래서 이들 3개의 나라들을 삼진(三晉)이라고 부른다.

          BC 307년 무령왕(武靈王) 시절
          장성을 쌓아, 대(代)로부터 시작하여 음산(陰山)을거쳐 고궐(高闕)에 이르기까지 요새를 건설하였다.


        BC 220 년경의 진시황(秦始皇) 에 의한 만리장성 쌓기

          시대적으로 보면 청동기시대때인 BC 770년 ~ BC 221 년 사이의 약 500년간의 중국에서는
          조그마한 나라들이 서로 치고 박고 싸우는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가 펼쳐지고 있었다.
          이때 무지막지한 힘으로 밀어 붙이는 진시황(秦始皇) 이라는 사람이 나타나서
          모든 중국을 통일 하여 진(秦)나라를 건설하였다.

          중국을 통일할 정도로 강력한 힘을 가진 진시황(秦始皇) 이 무서워 하는 것이 있었다.
          바로 북쪽의 흉노( 匈奴 ) 라고 하는 몽골-투르크계 國家였던 것이다.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북쪽의 흉노를 이길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오래전부터 있던 성(城)들을 다시 축조하고
          춘추전국시대 각 제후국들이 축조하였던 장성(長城)들을 서로 연결하여 만리장성을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진시황(秦始皇) 은 만리장성을 쌓고 만리장성 안쪽만 지키자는 심정이었다.


        한(漢)나라 ( BC 202 년 ~ AD 220 년 ) 시기의 만리장성 쌓기

          항우와 유방이 싸워서 유방이 이겨서 한(漢)나라를 세우고 중국을 통일한 사람이 한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이다.
          한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은 하룻 강아지 범 무서운줄 모르고
          BC 200년경에 만리장성을 넘어 흉노와 전쟁을 치르는데,
          전쟁에서 흉노족의 <목특>에게 사로잡혀 죽게 되었을 때 흉노에게 속국이되겠다는 약속과 함께
          앞으로 흉노를 형님으로 모시고, 매년 조공을 받치며,
          한(漢)나라의 공주를 흉노의 왕(王)에게 첩으로 대대로 상납하겠다는 약속을 하게 되었다.

          참고 : << 흉노족의 역사 >>

          흉노와 한(漢)나라의 이러한 주종 관계는 약 100 년간 계속되다가
          한(漢)나라 무제(武帝 : BC 141∼BC 87) 때에 가서 주종관계가 깨지게 되었다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그렇게 죽을 고비를 넘기고 살아서 돌아온 유방(劉邦)은 만리장성을 더 높게 샇아 올린다.
          후한(後漢)때에는 북쪽의 고구려의 군대가 자주 침범하여 와서 만리 장성을 쌓아 올렸다.
          그래서 한(漢)나라는 건국과 함께 시작하여 나라가 망할 때 까지 계속 만리장성을 쌓았던 것이다.

          한(漢)나라 400년 역사 속에는 중간에 외척이 나라를 뒤엎은 사건이 있었다.
          그래서 사실 한(漢)나라 속에는 다음과 같은 3개의 나라가 있다.

            전한 (前漢 : BC 206 년 ~ 8 년)

              유방(劉邦)이 항우와 대륙쟁탈 뒤에 세운 왕조
              수도 : 장안 (長安)


            신 (新 : BC 8 년 ~ AD 23 년)

              전한(前漢)의 외척이었던 왕망(王莽)이 전한(前漢)을 멸망시키고 세운 나라이다.


            후한 (後漢 : 25 년 ~ 220 년)

              전한(前漢) 왕족의 후손이었던 <유수(劉秀)>가 한(漢) 왕조를 다시 부흥시킴.
              수도 : 낙양 (洛陽)

              184년 장각(張角)을 중심으로 황건적의 난이 일어 나면서 후한의 통치 기능은 상실되었다.
              194년 황건적의 난이 평정되었다.
              황건적의 난을 평정하는 과정에서 조조, 유비, 손권이라는 영웅이 탄생하였고,
              이들이 위(조조), 촉(유비), 오(손권)의 3개의 나라를 건설하면서 중국은 삼국시대로 접어들게 된다.

              220년 후한의 마지막 황제였던 헌제는
              위(魏)나라의 왕이 되어 있는 조조의 아들에게 황제의 자리를 물려주었다.


          전한(前漢)의 고조선(古朝鮮) 침략 --- 후한(後漢)의 고구려(高句麗) 침략

            BC 108년 한(漢)나라 무제(武帝)는 고조선(古朝鮮)의 마지막 혈통인 위만조선(衛滿朝鮮)을 멸망시키고
            그곳에 한사군 (漢四郡)을 설치하였다.

            AD 28년 후한(後漢)의 군대가 고구려를 침략했으나 실패하였다.
            AD 37년 고구려가 후한(後漢)의 지배에 있던 낙랑을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AD 172년 후한(後漢)의 군대가 고구려를 침략했으나 고구려군에 의해 전멸 당하였다 --- 좌원(坐原)대첩


<< 만주지역을 놓고,,, 중국과 한국의 피터지는 전쟁 >>

            BC 220년 후한(後漢)은 멸망하였고
            중국은 위(魏), 촉(蜀), 오(吳) 나라가 전쟁을 하는 삼국시대로 접어 들었다.


        삼국시대 ( 三國時代 : 220 년 ~ 280 년 ) -- 위(魏)나라에 의한 만리 장성 쌓기

          후한(後漢) 말기 황건적의 난이 일어남으로써 사실상 후한(後漢)은 멸망하였다.

          220년 한(漢)나라의 뒤를 이어 조비(曹丕)가 황제로 즉위하면서 위(魏)나라를 건국하였고,
          221년 서천(四川) 지역에서 유비(劉備)가 황제로 즉위하면서 촉(蜀)나라를 건국하였고,
          229년 장강(長江) 유역에서 손권(孫権)이 황제로 즉위하면서 오(吳)나라를 건국하였다.

          이들 위(魏), 촉(蜀), 오(吳)나라가 전쟁을 하는 내용이 유명한 삼국지(三國志)이다.
          280년 조조의 위(魏)나라를 계승한 서진(西晋)이 중국을 재통일하면서 전쟁은 끝났다.

          위(魏)나라의 고구려 침략

            246년 위(魏)나라의 관구검이 고구려를 침공하였다.
            259년 위(魏)나라의 위지해(尉遲楷)가 고구려를 침공하였으나 대패하였다.

            2차례에 걸쳐 고구려 침략에 실패한 위(魏)나라는 고구려의 남침에 대비하여 만리장성을 쌓았다.


        서진(西晉, 265 년 - 317 년) & 동진(東晉 : 317 년 ~ 420 년)

          265년 위(魏)나라의 중신이었던 사마염(司馬炎)에 의해서 장안(長安)을 수도로 하여 진(晉)나라가 건국되었고,
          280년 중국을 통일시켰으나, 지방마다 강력한 세력들이 각축을 벌리고 있었다.

          293년 선비족(鮮卑族) 모용부(慕容部)의 부족장이었던 <모용외>가 고구려를 침입하였으나 실패하였다.
          296년 <모용외>가 고구려를 다시 침입하였으나 또 실패하였다.

          316년 흉노족의 유연(劉淵)이 세운 전조(前趙)의 공격을 받아 수도를 장강 남쪽으로 옮기게 되었는데,
          앞의 진 나라를 서진(西晉)이라고 하고 뒤의 진나라를 동진(東晉)이라고 한다.

          313년 고구려(高句麗)가 낙랑군과 대방군을 점령하였고
          317년 고구려(高句麗)가 현도군을 점령하였다.


        5호 16국 시대 ( 304년 ~ 439년 ) --- 북위(北魏) & 연(燕)나라에 의한 만리장성 쌓기

          304년 흉노족의 유연(劉淵)이 진(晉)나라로부터 독립하여 조(趙)나라를 건설하였다. --- 전조(前趙)
          316년 전조(前趙)는 서진(西晉)을 공격하여 수도인 장안(長安)을 함락시킨다. --- 서진(西晉) 멸망

          참조 : 흉노족의 전조(前趙), 후조(後趙)의 흥망과 흉노족 서천(西遷)의 역사

          5호 16국 시대는
          304년 전조(前趙)의 건국을 시작으로 중국은 여러나라로 쪼개지면서 서로 전쟁을 하게 되는때부터,
          439년 북위(北魏)에 의해 중국이 통일될 때까지를 말한다.

            북위(北魏 ; 386 년 ~ 439 년 ~ 534 년)

              386년 선비(鮮卑)족 탁발부(拓跋部)에 의해 화북에서 건국한 왕조인데,
              원래 국호는 위(魏)나라 였었다.
              전국시대(戰國時代)의 위(魏)나라( BC 453 년 ~ BC 225 년 )와
              삼국시대(三國時代) 조조의 위(魏)나라( 220 년 ~ 280 년 )와 구별하기 위해 북위(北魏)라고 한다.

              397년 후연(後燕)을 공격하여 하북성 일대의 땅을 차지하였다.
              398년 수도를 평성(平城)으로 옮기고, 백성 46만명을 수도로 강제이주시켰다.

              427년 흉노(匈奴)족이 세운 하(夏)나라를 공격하여 멸망시키고,
              436년 요하(遼河)지역을 지배하고 있던 북연(北燕)을 멸망시키고,
              439년 흉노(匈奴)족이 세운 북량(北涼)을 멸망시키고 화북지역을 통일하였다.

              이때부터 5호 16국 시대는 끝나고,
              남쪽에서는 남조(南朝)인 송(宋)나라와 북쪽에서는 북조(北朝)인 북위(北魏)가 남게되는데
              이때부터 수(隋)나라가 중국을 다시 통일할 때 까지를
              남북조 시대 (南北朝時代 : 439 년 ~ 589년 )라고 한다.

              534년 북위(北魏)는 동위(東魏), 서위(西魏)로 분열하게 된다.


          이 당시 중국에서 건국한 나라가 16개 국가 (실제는 16개보다 많았음 ) 였고,
          나라를 건설한 민족은 흉노(匈奴), 선비(鮮卑), 갈(羯), 씨(氐), 강(姜) 등의 5개 북방 유목 민족이었다.

          전쟁의 끝은
          420년 동진(東晉)의 유유(劉裕)는 장강 남쪽지역을 통일하고 송(宋)나라를 건국하였다.
          439년 선비(鮮卑)족이 건국한 북위(北魏)가 중국 북쪽의 모든 나라들을 정벌하고 통일하였다.

          이로써 5호 16국 시대는 끝나고, 남북조 시대가 시작된다.

          당시 선비(鮮卑)족인 모용(慕容)씨의 집안에서 세운 연(燕)나라는 다음과 같이 구분 된다.
          모두 연(燕)나라라고 하였지만 구분하기 위해 후세 사람들이 구별하기 좋게 다르게 이름을 붙였다.
          이 연(燕)나라들은 지금의 중국 요령성 (遼寧省) 부근에 있었던 나라들이다.

            전연 ( 前燕 : 337 년 ~ 370 년 )

              전조(前趙)의 귀족 출신이었던 모용황(慕容皝)이
              337년 지금의 요령성 조양시(遼寧省朝陽市)부근에서 스스로 독립하여 연(燕)나라를 건설하였다.
              370년 전연(前燕)은 전진(前秦)의 부견(苻堅)에 의해서 멸망하였다.

              342년 전연(前燕)의 모용황(慕容皝)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고구려를 침략


            후연 ( 後燕 : 384 년 ~ 409 년 )

              370년 전연(前燕)이 전진(前秦)에 멸망하였고,
              383년 전진(前秦)이 동진(東晉)과의 전투에서 대패하게 된다.
              384년 약해진 전진(前秦)의 혼란을 틈타 전연(前燕)의 귀족 출신이었던 모용수(慕容垂)가 건국함

              385년 고구려가 후연(後燕)의 요동(遼東)지역을 공격하여 요동과 현토지역을 장악하였고,
              포로 1만 명을 생포하였다.

              395년 후연(後燕)과 북위(北魏)와의 전쟁에서 후연(後燕)이 크게 패했다.
              397년 북위(北魏)의 공격으로 후연(後燕)이 크게 패했다.

              398년 모용덕(慕容徳)이 하남성(河南省)일대를 장악하고 연왕(燕王)이 되었다 -- 남연(南燕)

              400년 후연(後燕)이 고구려를 공격하여 요동(遼東)지역을 탈환했다.
              402년 고구려의 공격으로 요동(遼東)지역과 요령성 조양시(遼寧省朝陽市) 지역을 다시 빼앗김
              406년 후연(後燕)의 모용희(慕容熙)가 고구려의 요동(遼東)지역을 공격했지만 실패했다.

              407년 후연(後燕)의 장수였던 풍발(馮跋)이 쿠데타를 일으켜 북연(北燕)을 세움


            서연 ( 西燕 : 384 년 ~ 394 년 )

              384년 약해진 전진(前秦)의 혼란을 틈타 선비(鮮卑)족의 모용홍(慕容泓)에 의해 건국
              394년 후연(後燕)에 의해 합병됨


            남연 ( 南燕 : 398 년 ~ 410 년 )

              398년 북위(北魏)의 공격으로 크게 패한 후연(後燕)의 모용덕(慕容徳)이
              산동(山東)반도의 하남성(河南省)일대를 장악하고 연왕(燕王)이 되었다.

              410년 동진(東晉)의 유유(劉裕)의 공격으로 남연(南燕)은 멸망하였다.


            북연 ( 北燕 : 407 년 ~ 436 년 )

              407년 후연(後燕)의 장수였던 풍발(馮跋)이 쿠데타를 일으켜
              후연(後燕)을 멸망 시키고 북연(北燕)을 세움

              436년 화북을 통일하여 강성해진 북위(北魏)가 북연(北燕)을 공격해오자
              북연(北燕)의 왕(王)이었던 풍홍(馮弘)은 고구려(高句麗)로 망명하면서 북연(北燕)은 멸망하였다.


          선비족(鮮卑族) 의 연(燕)나라와 고구려와의 전쟁

            293년 선비족(鮮卑族) 모용부(慕容部)의 부족장이었던 <모용외>가 고구려를 침입하였으나 실패하였다.
            296년 <모용외>가 고구려를 다시 침입하였으나 또 실패하였다.

            342년 전연(前燕)의 모용황(慕容皝)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고구려를 침략하여
            고구려 수도인 환도성을 점령하고 왕족과 주민 5만명을 연(燕)나라의 수도 용성으로 압송하였다.

            348년 모용황(慕容皝)이 죽고 그의 아들 <모용준>이 왕위에 오른후
            고구려의 포로들을 무사히 고구려로 돌려보내 주었다.

            385년 고구려가 후연(後燕)의 요동(遼東)지역을 공격하여 요동과 현토를 쳐부수고 포로 1만 명을 생포하였다.
            400년 후연(後燕)이 고구려를 공격하여 요동(遼東)지역을 탈환했다.
            402년 고구려의 공격으로 요동(遼東)지역과 요령성 조양시(遼寧省朝陽市) 지역을 빼앗김
            406년 후연(後燕)의 모용희(慕容熙)가 고구려의 요동(遼東)지역을 공격했지만 실패했다.


        남북조 시대 (南北朝時代 : 439 년 ~ 589년 ) --- 북위(北魏)에 의한 만리장성 쌓기

          남조(南朝) : 강남을 중심으로 송(宋), 제(齊), 양(梁), 진(陳)의 4개 왕조가 차례로 흥망했던 시대.
          북조(北朝) : 화북(華北)지방의 북위(北魏), 동위(東魏), 서위(西魏), 북제(北齊), 북주(北周)의 5개 왕조 시대

          북위(北魏)는
          534년에 동위(東魏), 서위(西魏)로 분열하였다.
          550년 동위(東魏)는 국호를 북제(北齊)로 바뀌고,
          556년 서위(西魏)는 북주(北周)로 바뀌었고,
          577년 북주(北周)는 북제(北齊)를 멸망시켜 화북(華北)지방을 다시 통일하였다.

          581년 수(隋)나라의 양견이 북주(北周)의 왕(王)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고
          589년 수(隋)나라는 남조(南朝)의 마지막 왕조인 진(陳)나라를 멸망시켜 중국을 재통일하였다.


        수(隋)나라 ( 581년 ~ 618년 ) 와 만리장성

          한(漢)나라 멸망 후 중국은 삼국으로 분열되어 싸우는 三國時代를 거치고
          또 魏晉南北朝時代 라고 불리는 400 여 년간 여러나라가 서로 싸우게되는 혼란기를 겪게된다.
          수(隋)나라는 이러한 혼란기를 정리하고 400 년 만에 중국을 다시 통일하게 된다.

          수(隋)나라를 건설한 양견(楊堅)은
          선비(鮮卑)족이 건설한 북위(北魏)에서 갈라져 내려온 북주(北周)의 지배계층이었으므로,
          그 또한 선비(鮮卑)족의 후예임에 틀림이 없다.

          580년 북주(北周)의 왕(王)이 죽게 되었을 때 양견(楊堅)이 섭정함으로써 북주(北周)의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다.
          581년 수(隋)나라의 양견(楊堅)이 북주(北周)의 왕(王)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고 수(隋)나라를 건설하였다.

          수(隋)나라는 남쪽의 진(陳)나라를 공격하기에 앞서
          북쪽의 고구려와 돌궐의 침략에 대비해서 장성(長城)을 복구하여 방어를 강화했다.

          589년 수(隋)나라는 50만 대군을 동원하여
          남조(南朝)의 마지막 왕조인 진(陳)나라의 수도 건강(建康)을 공격하였는데,
          진(陳)나라 황제 진숙보(陳叔寶)는 우물에 숨어있다가 사로잡혔다.

          이로써 중국은 400년간의 기나긴 분열의 시대를 접고 통일된 수(隋)나라의 시대를 맞이하였다.
          그러나 수(隋)나라는 37년만에 망하게 되는데,
          고구려와의 16년동안 4차례에 걸친 전쟁을 실패함으로써 결국 멸망하게 되었다.

          수(隋)나라의 고구려(高句麗) 침략

            수(隋)나라가 만리장성을 넘어 고구려(高句麗)를 침략하여 16년동안 전쟁을 치루었지만
            한번도 이기지 못하고 패배하여 결국 나라까지 망하게 된 것이다.

            598년 수(隋)나라는 30만 대군을 동원하여 고구려를 침략하였지만 5만의 고구려군에 대패하였다.
            612년 수(隋)나라의 왕(양제)이 직접 군사 113만명을 거느리고 고구려를 침략하였으나
            <을지문득> 장군의 살수 대첩으로 실패하고 퇴각하였다.
            613년 수(隋)나라의 왕(양제)이 직접 고구려를 침략하였으나 또다시 실패하였다.
            614년 수(隋)나라의 왕(양제)이 직접 고구려를 침략하였으나 또다시 실패하였다.


        당(唐)나라 ( 618년 ~ 907년 ) 와 만리장성

          수(隋)나라의 마지막 임금이었던 수양제(隋煬帝) 와 이종사촌지간 이었던 이연(李淵 : 618∼626)이
          당(唐)나라를 세운 당고조(唐高祖)이다.
          고조(高祖) 이연(李淵)이 장안을 수도로 삼고 당(唐)나라를 건국하였다.

          이연(李淵)은 선비(鮮卑)족이 건설한 수(隋)나라의 최상부 지배계층에 있었으므로,
          그 또한 선비(鮮卑)족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이연(李淵)이 건설한 당(唐)나라는 결국 선비(鮮卑)족이 건설한 국가이다.

          당(唐)나라의 고구려(高句麗) 침략

            당나라의 2대 황제인 당태종 이세민(唐太宗 李世民)은
            630년 고창국과 비단길일대를 장악하고 동돌궐을 정복하여 당나라의 영토를 크게 넓혔다.
            642년 당(唐)나라의 군대가 만리 장성을 넘어 고구려를 침략하였으나 고구려의 <연개소문> 장군이 막아냈다.
            645년 당태종 이세민이 직접 30만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高句麗)를 침범하지만
            안시성에서 고구려의 명장 <양만춘> 장군에게 처참하게 패하고 후퇴하였다.
            647년 당(唐)나라에서는 수군 1만명 ( 우진달 장군 ) 과 육군 1만명 ( 이세적 장군 ) 으로
            고구려(高句麗)를 침범하였지만 실폐하고 돌아 갔으며
            648년에는 수군 3만명 ( 설만철 장군 )을 동원하여 고구려(高句麗)를 침범하였지만 역시 실폐하였고,
            649년에는 30만명의 대군을 준비하여 고구려(高句麗)를 점령할 계획을 세우고
            대규모 군대를 출병하기 전 전초전으로 수군 5만명으로 ( 설만철 장군 ) 고구려(高句麗)의 압록강변에 있는
            박작성을 공격하였으나 역시 실폐하였다는 소식을 들은 당태종 이세민(唐太宗 李世民)은
            649년에 세상을 떠난다.

            당태종 이세민(唐太宗 李世民)이 죽을 때 한 유언이
            앞으로는 절대로 만리장성을 넘어 북쪽에 있는 나라를 쳐들어 가지 말라고 했다고 한다.

            649년 51세의 당태종 이세민(唐太宗 李世民)이 죽고 그의 아들인 22살의 이치 ( 당 고종 )가 등극하였다.

            655년 당나라는 다시 고구려를 침략하였으나 실폐하였고
            659년에는 당(唐)나라의 설인귀의 군대가 고구려(高句麗)를 침략하였으나 실폐하였다.

            660년 당(唐)나라의 소정방의 13만 군사와 신라 김유신의 5만의 군사가 백제를 침략하여
            나당연합군의 공세에 밀린 백제는 결국 멸망하고 말았다.

            661년 백제를 멸망시킨 나당연합군은 고구려(高句麗)로 진격하였다.
            3차례에 걸친 전쟁을 고구려(高句麗)는 모두 막아 내면서 당(唐)나라 군대를 격퇴시켰다.
            전쟁은 고구려(高句麗)가 승리했지만, 고구려(高句麗)에서는 경제적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었고
            당(唐)나라에서는 계속된 전쟁에서의 실패로 인해 고구려(高句麗)를 침공할 뜻을 접어야 했었다.

            그후 고구려(高句麗)의 내분을 틈타 당(唐)나라는 다시 고구려(高句麗)를 침략하였다.
            667년 당(唐)나라는 다시 고구려(高句麗)를 침략하여 수많은 성(城)들을 점령하였고,
            668년 당(唐)과 신라 연합군의 공격으로 고구려(高句麗)의 평양성이 함락되고, 고구려(高句麗)는 멸망하였다.

            만리장성 북쪽의 고구려가 멸망하였으니
            당(唐)나라는 만리장성을 넘어 북쪽으로 쉽게 쳐들어 오게 되었다.


          그리고 고구려(高句麗) 멸망의 여파는 매우 컸다.
          동아시아의 여러 소수민족들을 다둑거리면서 지내던 고구려(高句麗)가 사라짐으로써
          중국에서 동이족이라고 부렀던 우리민족과 같은 계통의
          여진족, 말갈족, 흉노족(훈족), 선비(鮮卑)족, 돌궐족, 쥬신족(조선족), 민주족, 거란족, 몽골족 등의
          주변의 소수 민족들의 국가들도 모두 멸망하게 되는 길을 걷는다.
          고구려
          (高句麗) 멸망 후 당(唐)나라의 침략으로 돌궐도 망했으며 서쪽으로 옮겨 서돌궐을 건국하게 된다.

          하지만 이것도 잠시,,
          고구려
          (高句麗)가 망한지 30년뒤인 698년에 한반도 북부와 만주 그리고 연해주 지역에서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을 규합하여 고구려
          (高句麗)의 장군이었던 대조영(大祚榮)이 발해(渤海)를 건국한 후로
          당(唐)나라는 만리장성을 넘어 갈수 없게 되었으며,
          무서운 북쪽의 기마 민족들이 쳐들어 올까 겁이나서 그때부터 또 만리장성을 쌓았던 것이다.

          발해(渤海)의 당(唐)나라 침략

            719년 대조영(大祚榮)이 죽고 아들인 무왕(武王 -- 재위:719년~737년)이 즉위했다
            726년 동생인 대무예(大武藝)로 하여금 흑수말갈(黑水靺鞨)을 공격하게 하였으나,
            대문예(大武藝)는 형인 무왕(武王)의 명령을 거부하고 당에 망명하였다.

            732년에는 장문휴(張文休)에게 수군을 이끌게 하여 당나라의 등주(登州, 지금의 산둥성 옌타이)를 공격하였다.
            733년 위기를 느낀 당은 신라에도 원군을 요청했다.
            733년 김유신의 손자 김윤중(金允中) 등이 신라군을 이끌고 발해로 진군했지만 실폐하고 돌아갔다.
            때마침 폭설이 내려 군사의 반을 잃고 돌아설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737년 무왕이 죽고 아들인 문왕(文王)에 즉위하여 또다시 당나라를 공격하여 말갈 부락을 복속시켰다.

            발해(渤海 : 698년 - 926년)는 907년 당(唐)나라가 망한 후
            거란족(契丹族)이 세운 요(遼)나라의 침입으로 926년에 멸망하게 된다.

            당(唐)나라의 멸망은
            875 년 ~ 884 년사이에 일어난 황소의 난에 의해 멸망의 단계에 들어 갔었고,
            907년 오대십국 시대(五代十國時代)의 후량(後梁)을 건설한 <주전충(朱全忠)>에 의해 멸망하였다.


        오대십국 시대(五代十國 時代 : 907 년 ~ 960 년 )

          907년 당(唐)나라가 멸망한 후 중국은 약 60년동안 5개 또 10개의 나라로 나눠어져 싸우게 되는데,
          이때를 오대십국 시대 ( 五代十國時代 ; 907년 ~ 960년 ) 라고 한다.

          오대(五代)는 후량, 후당, 후진, 후한, 후주를 말하고
          십국(十國)은 오월, 민, 형남, 초. 오, 남당, 남한, 북한, 전촉, 후촉을 말한다.

          960년 오대십국( 五代十國 )중에서 후주(後周)라는 나라가 있었는데,
          후주(後周)의 장군이었던 조광윤(趙匡胤)이 후주(後周)를 멸망시키고 송(宋)나라를 세웠다.


        요 나라 ( 遼 : 916 년 ∼ 1125 년 )

          요(遼)나라는 거란(契丹)족이 세운 나라로 몽고지역 남쪽의 내몽고 자치구 지역을 중심으로
          중국 북쪽을 지배한 왕조였다.
          초대 황제는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이다.

          수도 : 상경임황부(上京臨潢府 : 현재의 중국 내몽고 자치주 巴林左旗 남쪽 )

          요나라는 건국초기
          동쪽에 있는 발해(渤海 : 698년 - 926년)를 공격하여 멸망시키고,
          서쪽으로는 몽고 지역의 몽고족을 공격하였고,
          남쪽으로는 송(宋)나라를 공격하여 송(宋)나라로부터 조공을 받는 위치에 있었다.

          요(遼)나라에 의한 발해(渤海) 멸망과 요(遼)나라의 고려(高麗) 침략

            926년 요(遼)나라는 동쪽에 있는 발해(渤海 : 698년 - 926년)를 공격하여 멸망시켰다.

            거란족이 세운 요(遼)나라 ( 907 년 ~ 916년 ~ 1125 년 )는
            고려(高麗)의 북진 정책(北進 政策)과 친송정책(親宋政策)에 대한 불만으로
            요(遼)나라는 3차례에 걸쳐 고려(高麗)를 침입한다.

              993년 요(遼)의 소손녕이 80만의 대군을 이끌고 고려(高麗)로 침략해 왔다.
              서희의 단판 외교로 고려(高麗)는 압록강 동쪽의 강동 6주를 획득했다.

              1010년 요(遼)의 성종 임금이 직접 40만 대군을 거느리고 고려(高麗)를 침략해 왔다.--- 실패

              1018년 요(遼)나라의 소배압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침략해 왔다.
              강감찬의 귀주 대첩 -- 침략군 10만명 대부분이 사살됨


            고려(高麗)가 요(遼)나라의 공격을 막아 냄으로써 이득을 본 나라는 힘없는 중국의 송(宋)나라였다.
            만약 요(遼)나라가 고려(高麗)를 침략하지 않고 먼저 송(宋)나라를 쳤다면
            송(宋)나라는 멸망하였을 것이다.


          1115년 여진(女眞)족이 만주 북부 지역에서 금(金 : 1115년 ∼ 1234 년 )나라를 건국하였다.
          1125년 금(金)나라의 공격을 받고 요(遼)나라는 건국 110년만에 멸망하였다.


        금 나라 ( 金 : 1115년 ∼ 1234 년 )

          본래 여진(女眞)족은 만주 북쪽의 흑룡강 주변에 살았던 민족이다.
          고조선, 부여, 고구려, 발해, 요(遼)나라의 지배를 받다가,
          거란(契丹)족의 요(遼)나라의 세력이 약해지는 틈을 타서 독립하여 왕국을 건설하였다.

          고려(高麗)의 여진(女眞) 정벌

            1107년 고려(高麗)의 윤관장군은 여진족을 북방으로 쫓아 버리고, 동북 지방 일대에 9성을 쌓아 방어하였다.
            1108년 고려(高麗)는 여진(女眞)족에게 빼앗은 9성을 돌려주었다.


          1115년 여진(女眞)족의 아구타(阿骨打)라는 사람이 금(金)나라를 건국했다.

          금나라의 역사를 적어 놓은 금사(金史)라는 책에서는
          금(金)나라의 초대 황제인 아구타(阿骨打)는 신라(新羅) 김(金)씨의 후손이라고 적고 있다.

          1125년에는 요(遼)나라를 공격하여 요(遼)나라를 멸망시키고,
          1127년에는 남쪽의 송(宋)나라를 공격하여 송(宋)나라를 강남으로 밀어냈다 --- 남송(南宋)

          1214년 몽고족이 세운 원(元)나라의 공격을 받고 수도를 뻬이징에서 카이펑(開封)으로 옮겼다.
          1234년 원(元)나라의 공격을 받아 왕(王)이 자살함으로써 금(金)나라는 건국 120년 만에 멸망하였다.


        송(宋) 나라 : 北宋 ( 960 년 ∼ 1127 년 )  南宋 ( 1127 년 ∼ 1279 년 ) 와 만리장성

          907년 당(唐)나라가 멸망한 후 중국은 약 60년동안 5개 또 10개의 나라로 나눠어져 싸우게 되는데,
          이때를 오대십국 시대 ( 五代十國時代 ; 907년 ~ 960년 ) 라고 한다.

          오대십국중에서 후주(後周)라는 나라가 있었는데
          960년 후주(後周)의 장군이었던 조광윤(趙匡胤)이
          후주(後周)로부터 선양을 받아 카이펑(開封)에 도읍하여 송(宋)나라를 세웠다.

          송(宋)나라를 세웠으나
          북쪽의 거란족이 세운 요(遼) 나라의 침략으로
          나라를 지킬려면 만리 장성부터 보수하고 다시 쌓아야 했던 것이다.

          건국 당시부터 몽골-투르크계의 契丹 ( 遼 907 ∼ 1125 )으로부터 대륙의 패권을 빼앗겨 조공관계를 맺었고,
          1127년 여진(女眞)족이 건설한 금(金)나라의 공격을 받아 수도였던 개봉(開封)이 함락되고,
          황제였던 조항(趙恒) = 흠종(欽宗)은 금(金)나라로 압송되었고 북송(北宋)은 멸망하였다.

          조항(趙恒)의 동생이었던 조구(趙構)가 남쪽으로 도망하여 항주(抗州)에서 남송(南宋)을 건설하였으나,
          힘이 없었던 남송(南宋)도 금(金)나라에 조공을 받치는 신세로 전락하였다.

            북송(北宋 : 960년 ~ 1127년)의 수도 : 카이펑(開封) --- 금(金)나라에 멸망
            남송(南宋 : 1127년 ~1279년)의 수도 : 항저우(抗州) --- 원(元)나라에 멸망


          1279년 몽골족이 건설한 원(元)나라의 공격으로 남송(南宋)도 멸망하게 되는데,
          원(元)나라에게 끝까지 저항한 죄로 한족(漢族)들은 최하층 백성의 대접을 받게 되었다.


<< 송(宋)나라 시대의 지도 - 만리장성의 위치 >>

        원 나라 ( 元 : 1271 년 ~ 1368년 ~ 1635 년)

          1206년 테무진 -- 징기스칸이 몽골을 통일하고 왕국을 건설하였다.
          1214년 징기스칸 군대는 금(金)나라를 공격하였다.
          1219년부터 1222년 사이에 다시 금(金)나라를 공격하였으며,
          1234년 결국 금(金)나라를 멸망 시켰다.

          1271년 국호를 원(元)이라고 바꾸었다.
          1279년 남송(南宋)을 공격하여 멸망시켰다.

          몽고군의 고려(高麗) 침략과 고려(高麗)의 저항

            1231년 몽골군이 고려(高麗)로 침입해 왔다.
            1232년 ( 2차 ), 1235년( 3차 ), 1247년( 4차 ), 1253년 ( 5차 ), 1254년( 6차 )에 걸쳐 고려(高麗)로 침입해 왔다.
            1259년 고려(高麗)의 항복으로 침략 전쟁은 끝이 났다.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 : 원나라에서 고려를 통치하기 위해 설치한 기구 -- ( 1258년 설치 ~ 1356년 회복 )

            1356년 고려에서 원나라의 지배하에 있었던 압록강 건너 파사부(婆娑府: 현재 중국 단동)를 공격하여,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를 수복하였으며 고려(高麗)에서 요동지역을 점령하였다.

            1359년 12월부터 1360년 2월까지 홍건적 4만 명이 고려를 침입하였다 -- 1차 홍건적의 고려 침공 --실패
            1361년 11월부터 1362년 1월까지 홍건적 15만 명이 고려를 침입하였다 -- 2차 홍건적의 고려 침공 --실패
            1362년 2월부터 7월까지 요동의 몽골 군대가 고려를 침략 -- 이성계의 고려(高麗)군에게 패주


          1368년 남쪽에서 건국한 명(明)나라의 공격을 받아 만리장성 북쪽의 몽골고원으로 물러났다.
          이때부터의 청(淸)나라에 의해 멸망 할 때 까지의 원(元)나라를 북원(北元 : 1368년 ~ 1635년)이라고 한다.


        명(明)나라( 1368 ∼ 1644 )가 만리장성을 다시 쌓고 만리장성을 넘지 않은 이유

          1368년 중국 남쪽지역을 평정한 주원장(朱元璋)이 난징-남경(南京)에서 황제로 즉위하여 명(明)나라을 건국하고
          곧바로 군사를 이끌고 곧바로 힘이 없는 원(元)나라의 수도인 뻬이징으로 쳐들어 갔다.
          더이상 중국을 지배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원(元)나라의 토곤 테무르는
          수도인 대도(뻬이징)을 버리고 만리장성 북쪽의 몽골고원으로 물러났다.

          명(明)나라의 군대는 만리장성까지 진군하고 만리장성을 경계선으로 그 남쪽을 차지하게 되었으며
          그리고 북쪽의 원(元)나라의 세력이 겁이나서 만리장성을 더더욱 견고하게 쌓게 되었다.

          사실 당시 명나라 군대가 만리장성을 넘지 않은 이유는 간단하다.
          지금까지 중국의 영토는 북쪽으로는 만리장성이 끝이었다.
          중국에서 만리장성이 가지고 있는 의미는 그 북쪽은 중국땅이 아니고, 남쪽만 중국땅이다는 것을 의미한다.

          고려(高麗)의 요동정벌 계획과 위화도 회군 (威化島回軍)

            1388년 최영 장군의 요동정벌 계획을 반대한 이성계가 압록강의 위화도에서 군사를 회군하였다.
            1392년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였다.


          1644년 청(淸)나라의 공격을 받아 약 300년 왕조의 명(明)나라는 멸망하였다.


        청(淸)나라( 1616∼1912 ) 와 만리장성

          1616년 만주족(또는 여진족)인 <누르하치>가 만주지역을 통일하고 후금(後金)이라는 나라를 세웠다.
          1635년 북원(北元)나라의 항복을 받고 중국 북부지역을 차지 했으며,
          1636년 <홍타이지>는 만주(満洲)족, 한(漢)족, 몽골족의 3 민족의 추대를 받아 대청국 황제로 즉위했다.
          1644년 명(明)나라 수도였던 뻬이징(北京)을 점령하고 청(淸)나라의 수도로 삼았다.

          1884년 ~ 1885년 청불(淸佛)전쟁으로 인도차이나 반도에서의 지배권을 잃었고
          1894년 ~ 1895년 청일(淸日)전쟁으로 조선(朝鮮)에서의 영향권을 상실
          1904년 ~ 1905년 로일(露日)전쟁으로 중국내에서의 일본의 영향권이 확대 됨

          1912년 1월 1일 남경(南京)에서 중화민국(中華民国)이 수립됨
          1912년 2월 12일 북경(北京)에서 청(淸)의 황제가 퇴위되면서 300년역사의 청(淸)나라는 멸망하였다.

          청(淸)나라는 만리장성 북쪽에 강성한 국가가 없는 시기였으므로
          만리장성을 넘어 북쪽으로 가는 것을 아주 쉽게 넘나들었다.

          청(淸)나라의 조선(朝鮮) 침략 --- 1627년 (정묘호란) & 1636년 (병자호란)

            후금(後金 = 후에 청(淸)나라로 이름을 바꿈)은
            명(明)나라를 치기전에 명(明)나라와 친분이 두터운 조선(朝鮮)을 먼저 공격하여야 하였다.

            당시 조선(朝鮮)은 임진왜란(壬辰倭亂 : 1592년 ~ 1598년)의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에
            이번에는 북쪽의 청(淸)나라의 침략을 당하게 되었다.

            광해군은
            북쪽에 있는 후금(후에 淸나라로 이름을 바꿈)과 남쪽의 명(明)나라 사이에 중립외교 정책을 썼는데
            인조(仁祖 : 재위 1623년 ~ 1649년 )가 즉위한 후에
            조선(朝鮮)은 후금(後金)을 배척하고 명(明)나라와 친선 관계를 유지하였다.

            이에 자극 받은 후금(後金)에서는 1627년 3만의 군대를 이끌고 조선(朝鮮)을 침공해 왔다 (정묘호란).
            인조와 신하들은 강화도로 피난을 갔고
            후금(後金)과 형제 관계를 맺겠다는 조약을 맺은 후 전쟁을 마무리지었다.

            1636년 국호를 청(淸)나라로 바꾼 후금(後金)은 형제 관계가 아닌 군신 관계를 요구해 왔다.
            조선(朝鮮)이 이 요구를 거부하자
            청(淸)나라는 12만 군대를 이끌고 또다시 조선(朝鮮)을 침략했다(병자호란).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인조는 서울을 버리고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항전하다가 항복하게 된다.
            이때부터 조선(朝鮮)은 청(淸)나라와 군신 관계를 맺게 된 것이다.

            고려시대때에는
            요(遼)나라가 남쪽의 송(宋)나라를 치기 위해서 고려(高麗)를 먼저 침략했었는데,
            고려(高麗)에서 3번의 침략을 모두 막아 내는 바람에 송(宋)나라가 살았었는데
            조선시대때에는
            청(淸)나라가 남쪽의 명(明)나라를 치기 위해서 조선(朝鮮)를 먼저 침략했었는데,
            조선(朝鮮)에서 2번의 침략을 모두 막아 내지 못하는 바람에 명(明)나라가 망하게 되었다.


          청(淸)나라가 중국 역사상 가장 큰 영역을 차지하게 되었고,
          주변의 특별한 강국이 없어서 만리장성도 아무런 제약도 없이 쉽게 넘나들었고,,,,,,,
          그래서 오늘날 중국(中國)의 영토가 엄청나게 큰 것이 된 것이다.
          유사이래로 중국의 영토가 이렇게 큰적이 한번도 없었다.

          중국사람들은 청(淸)나라 이전에는 만리장성 북쪽의 만주 땅을 중국의 영토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이런 사실은 중국의 여러 역사책에서 나온다.
          하지만 만주 지역에서 출발한 청(淸)나라 왕조가 중국을 지배하게 되었으니
          지금의 중국은 아주 운이 좋게 만리장성 북쪽을 자신의 영토로 생각하게 되었던 것이다.


<< 청(淸)나라 시대의 지도와 만리장성 >>

      중국을 통치한 왕조(王朝)중에서 중국사람인 한족(漢族) 이 중국을 통치하였던 王祖는 몇 개 없다.

        우리나라는 왕조가 보통 500년이 넘는데,
        중국은 수많은 왕조(王朝)가 역사에 등장했다가 망하고 하여 중국의 왕조들은 그 통치 기간이 길지가 못했다.

        중국의 왕조 중에서 한족(漢族)이 中原을 통일하고 100 년 이상 역사를 지속한 왕조는 몇 개 되지 않는다.
        유(劉)씨의 한(漢)나라, 조(趙)씨의 송(宋)나라, 주(朱)씨의 명(明)나라 가 전부이다.

        한마디로 중국의 역사는
        자신들이 중국을 통치하지 못하고 이민족의 지배를 받아온 피지배계층의 역사였던 것이다.

        삼황오제(三皇五帝) 시대 ( BC 3528년 ~ BC 2070년 )

          중국인들이 자랑하는 삼황 오제
          삼황은,,,,,복희(伏羲), 여와(女娲), 신농(神農)
          오제는,,,,,황제(黃帝), 전욱(颛顼), 제곡(帝喾), 당요(唐堯), 우순(虞舜) 

          태호 복희(BC3528∼BC3413)는
          배달국(倍達國)의 환웅(桓雄) 시대때 5대 태우 환웅(桓雄)의 12번째막내 아들로 태어난
          우리나라 민족 ( 동이족/東夷族 ) 이었던 것이다.
          태호복희
          (伏羲)가 우리나라 사람이었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는 것은
          한국의 역사책 뿐아니라 중국의 역사책에서도 그렇게 기록되어져 있다

          또 BC 2700 년경에 배달국의 14대 환웅(桓雄)이었던 치우천황(蚩尤天皇)과 10년에 걸쳐서 전쟁을 치룬
          오제(五帝)의 첫 번째 임금인 황제(黃帝)도 동이족(東夷族) 이었고,
          요(堯), 순(舜) 임금까지 모두 동이족(東夷族) 이었다는 사실이 역사서에 기록되어져 있다.

          참고 : << 치우천황(蚩尤天皇)과 중국 황제(黃帝)의 탁록전투 >>


        하 (夏)왕조 ( BC 2070 ~ BC 1766 )

          삼황오제가 동이족이었는데 그 후손이 세운 나라도 동이족이 다스린 나라이었다.

          중국 전설상의 가장 오래 된 왕조로 본다.
          삼황 오제의 마지막 시대인 요(堯), 순(舜), 우(禹) 임금 시절을 거치고,,,,
          우(禹) 임금부터 시작된 세습왕조를 하(夏) 나라라고 말한다.


        은 (殷)왕조 ( BC 1766 ~ BC 1027 ) / 상(商) 왕조

          실제 유물과 유적들이 많이 발굴되어 은(殷) 나라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왕조이다.

          중국의 역사책 중에 가장 유명하고 정통의 역사서로 인정받는 책이
          바로 << 사마천 >>이라는 사람이 쓴  << 사기(史記) >> 라는 역사책입니다.
          이책에서 << 은(殷)나라는 동이(東夷)족의 나라이다. >> 라고 합니다.


        주(周) 왕조 ( BC 1122 ∼ BC 256 )

          중국의 서쪽지역에서 세력을 구합하한 주문왕 (周文王)은 주(周)나라를 세우고
          그리고 그 아들인 주무왕 (周武王 ; BC 1169 ~ BC 1116 ) 은
          허난성(河南省) 목야(牧野)에서 은(殷)나라의 마지막 임금인 주왕(紂王)의 대군을 격파하여 은나라를 멸망시키고,
          그리고 지금의 산시성(陝西省) 시안(西安) 부근-- 당시의 호경(鎬京) -- 에 도읍을 정했다.

          주(周)나라의 지배계층은 선비(鮮卑)족이었다.


        연(燕)나라 ( BC 1100 년 ~ BC 221 년 )

          주(周)나라의 제후국으로 출발한 연(燕)나라는 선비(鮮卑)족이 건설한 국가 였다.


        진(秦)나라 ( BC 221 ~ BC 206 년 )

          진시황 (秦始皇)이 BC 221년에 중국 최초의 통일국가를 건설한다. 
          중앙집권적 전제정치 확립, 문자(한자/漢字)사용, 화폐 사용, 만리장성 축조,

          오늘날 우리가 중국을 차이나(China) 라고 부르게 된 것은 바로 이 진(秦)나라에서 유래된 것이다.

          미국에 거주하는 중국인 물리학자인 주쉐이위안 (朱學淵) 이라는 사람이 쓴 책의 제목이
          << 진시황 (
          秦始皇)은 몽골어를 말한 여진인(女眞人) 이었다 >> 이다.
          중국 사람들도 진시황 (
          秦始皇)을 중국사람이 아닌 동이족(東夷族)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한(漢)나라 ( BC 206년 ~ AD 220 년 )

          항우와 유방이 싸워서 유방이 이겨서 한(漢)나라를 세우고 중국을 통일한 사람이 한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이다.
          한(漢)나라는 약 400년을 지속하면서,
          중국의 역사상 한족(漢族)이 통치한 국가중에서 가장 강대했던 시기 중의 하나이며,
          오늘날 중국의 문자를 한자(漢字)라고 하고,,,또 중국 사람들을 한족(漢族)이라고 부르게 되는데,,,,
          모두 이 한(漢)왕조의 이름에서 유래된 것이다.


        수(隋)나라 ( 581년 ~ 618년 )를 세운 수문제 ( 隋文帝 )

          한(漢)나라 멸망 후 중국은 三國時代를 거쳐 魏晉南北朝時代 라고 불리는 400 여 년간 大혼란기를 거치는데,
          이러한 혼란기를 정리하고 400 년 만에 중국을 통일한 나라는 수(隋)나라 ( 581년 ~ 618년 )이다.

          수(隋)나라를 건설한 양견(楊堅) -- 수문제 ( 隋文帝 )는
          선비(鮮卑)족이 건설한 북위(北魏)에서 갈라져 내려온 북주(北周)의 지배계층이었으므로,
          그 또한 만리장성 북쪽의 내몽고 지역에 뿌리를 둔 선비(鮮卑)족의 후예임에 틀림이 없다.

          580년 북주(北周)의 왕(王)이 죽게 되었을 때 양견(楊堅)이 섭정함으로써 북주(北周)의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다.
          581년 수(隋)나라의 양견(楊堅)이 북주(北周)의 왕(王)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고 수(隋)나라를 건설하였다.

          수(隋)나라의 지배 계층은 선비(鮮卑)족이었으며, 중국의 한족(漢族)은 피지배계급이었던 국가였다.


        당(唐)나라 ( 618년 ~ 907년 )를 세운 당고조 (唐高祖) 이연(李淵 : 618∼626)

          당고조(唐高祖) 이연(李淵 : 618∼626) 은 수양제(隋煬帝) 와 이종사촌간 이었다.
          이연 또한 北魏 부터 정권의 핵심에 있던 선비(鮮卑)족의 탁발부 사람으로 선비(鮮卑)족의 후예이었다.
          그러므로 당(唐)나라 또한 선비(鮮卑)족이 중국에서 세운 나라인 것이다.

          이연(李淵)은 선비(鮮卑)족이 건설한 수(隋)나라의 최상부 지배계층에 있었으므로,
          그 또한 선비(鮮卑)족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이연(李淵)이 건설한 당(唐)나라는 결국 선비(鮮卑)족이 건설한 국가이다.

          지금 중국에서는 이런 다른 민족들을 은근슬적 漢族化 함으로써
          중국이 이민족에 의한 피지배의 역사가 아닌 자신들의 역사로 만들고자하는 것이
          漢族 들의 역사왜곡이며, 동북공정인 것이다.

          당(唐)나라가 몽골-투르크계 국가라는 것을 알 수 있는 일화가 있다.
          몽고가 고려를 침략하여 결국 항복한 高麗의 高宗 임금은
          태자 禎 ( 고려 24 대 元宗, 1219 ~ 1274 ) 을 몽골에 볼모로 보내게 된다.
          그때 정(禎)은 몽골제국의 실력자로 후에 원(元) 을 건국한 쿠빌라이 ( 1215 ~ 1294 世祖 )에게 인사를 하게 된다.
          이때 30 여년을 항쟁하다 패전한 고려의 태자를 맞은 쿠빌라이는 이렇게 감격하였다고 한다,
          << 당태종(唐太宗)도 무너뜨리지 못하였던 高(句)麗 의 태자가 나를 따르게 되다니...>>

          이 말은 몽고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들의 선조인 흉노, 선비(鮮卑)족이 세운 당(唐)나라도 자신들의 역사이며,
          몽고의 정치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선조인 당태종(唐太宗) 이세민(李世民)을 본받고 싶었던 마음이었던 것이다.


        宋 ( 北宋 : 960 ∼ 1127 / 南宋 : 1127 ∼ 1279 )

          907년 당(唐)나라가 멸망한 후 중국은 약 60년동안 5개 또 10개의 나라로 나눠어져 싸우게 되는데,
          이때를 오대십국 시대 ( 五代十國時代 ; 907년 ~ 960년 ) 라고 한다.

          오대십국중에서 후주(後周)라는 나라가 있었는데
          960년 후주(後周)의 장군이었던 조광윤(趙匡胤)이
          후주(後周)로부터 선양을 받아 카이펑(開封)에 도읍하여 송(宋)나라를 세웠다.

          송(宋)나라는 한족(漢族)이 세운 왕조이다.
          모처럼 중국에서 자신들의 민족인 한족(漢族)이 세운 왕조가 나오는데
          이 송(宋)나라는 경제적으로 발전하였고 문화적으로 융성하였지만 중국 역사상 가장 약한 왕조라고 말할 수 있다.

          건국 당시부터 몽골-투르크계의 契丹 ( 遼 907 ∼ 1125 ) 으로부터 대륙의 패권을 빼앗겨 조공관계를 맺었고,
          또 다른 외세인 퉁구스계 女眞 ( 金 1115 ∼ 1234 )에게 中原 을 내어주고 조공관계를 맺은후
          南宋 이라는 이름으로 겨우 보존 할 수 있었던 왕조였으며,
          몽골에 의하여 南宋 이 멸망당하고 元 에게 끝까지 저항한 죄로 漢族 들은 최하층 백성의 대접을 받게 되었다.


        요(遼)나라 ( 907 년 ~ 916 년 ∼ 1125 년 )

          요(遼)나라는 거란(契丹)족이 세운 나라로 몽고지역 남쪽의 내몽고 자치구 지역을 중심으로
          중국 북쪽을 지배한 왕조였다.
          초대 황제(皇帝)는 야율 아보기(耶律 阿保機)이다.

          907년 야율 아보기(耶律 阿保機)는 거란(契丹)족의 족장(族長)의 자리에 오른다.
          916년 황제(皇帝)의 자리에 오른다 -- 국명 : 거란(契丹)
          947년 국명을 요(遼)로 변경
          983년 국명을 거란(契丹)으로 변경
          1066년 국명을 요(遼)로 변경

          수도 : 상경임황부(上京臨潢府 : 현재의 중국 내몽고 자치주 巴林左旗 남쪽 )

          요나라는 건국초기
          동쪽에 있는 발해(渤海 : 698년 - 926년)를 공격하여 멸망시키고,
          서쪽으로는 몽고 지역의 몽고족을 공격하였고,
          남쪽으로는 송(宋)나라를 공격하여 송(宋)나라로부터 조공을 받는 위치에 있었다.

          요(遼)나라에 의한 발해(渤海) 멸망

            926년 요(遼)나라는 동쪽에 있는 발해(渤海 : 698년 - 926년)를 공격하여 멸망시켰다.


          요(遼)나라의 3차례에 걸친 고려(高麗) 침략 --- 남쪽의 송(宋)을 침략하기 위해서

            993년 요(遼)의 소손녕이 80만의 대군을 이끌고 고려(高麗)로 침략해 왔다.
            서희의 단판 외교로 고려(高麗)는 압록강 동쪽의 강동 6주를 획득했다.

            1010년 요(遼)의 성종 임금이 직접 40만 대군을 거느리고 고려(高麗)를 침략해 왔다.--- 실패

            1018년 요(遼)나라의 소배압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침략해 왔다.
            강감찬의 귀주 대첩 -- 침략군 10만명 대부분이 사살됨

            고려(高麗)가 요(遼)나라의 공격을 막아 냄으로써 이득을 본 나라는 힘없는 중국의 송(宋)나라였다.
            만약 요(遼)나라가 고려(高麗)를 침략하지 않고 먼저 송(宋)나라를 쳤다면
            송(宋)나라는 멸망하였을 것이다.


          1115년 여진(女眞)족이 만주 북부 지역에서 금(金 : 1115년 ∼ 1234 년 )나라를 건국하였다.
          1125년 금(金)나라의 공격을 받고 요(遼)나라는 건국 110년만에 멸망하였다.


        금(金)나라 ( 1115 ∼ 1234 )

          여진족(女眞族)은 원래 지금의 만주 헤이룽장 성에 거주했던 민족이었다.
          고구려( BC 37년 ~ AD 668년 )가 그땅을 차지하였을 때에는 고구려의 지배를 받다가,,,
          발해 ( 698년 ~ 926년 )가 그땅을 차지 하였을 때에는 발해의 지배를 받다가,,,,
          요(遼)나라 ( 907년 ~ 1125년 )가 그땅을 차지 하였을 때에는 요(遼)나라의 지배를 받았다.

          그러다가 거란족이 세운 요(遼)나라가 세력이 약해지는 기회를 잡아
          결국 여진족들은 거란의 지배에서 벗어나면서 김 아골타(金 阿骨打)라는 사람이 금(金)나라를 건국했다.

          935년 신라(新羅)가 멸망하고 난후 신라 왕족(김씨)중에서
          당시 고려국(高麗國)의 평산(황해도 平山)지방에 살고 있었던 김 함보(金 函普)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북만주 흑룡강(黑龍江) 유역에 여진족(女眞族)들이 살고 있는 완안부(完顔府)로 이주하였다.

          완안부(完顔府)에서 높은 학식과 지도력을 인정받아
          완안부(完顔府) 족장(族長)의 지도자로 선출된 김 함보(金 函普)는
          주변에 살고 있는 조선인(朝鮮人), 말갈인(靺鞨人), 여진인(女眞人)들을 통합하여
          강력한 부족 연맹체로 키워 나갔다.

          김 함보(金 函普)의 8대손이었던 김 아골타(金 阿骨打)는
          1113년 형(兄)이 죽게되자 완안부(完顔府) 족장(族長)의 자리를 인계받게 되었다.
          1114년 요(遼)나라의 지배를 거부하고, 요(遼)나라의 지배하에 있던 길림성(吉林省)을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1115년 김 아골타(金 阿骨打)는 국호를 금(金)이라고 정하고 황제(皇帝)의 자리에 오른다.
          1120년 요(遼)나라의 수도인 상경(上京)을 점령하고,
          1121년 또 다시 요(遼)나라를 공격하여 남경(南京 : 지금의 북경)을 점령하여 자신들의 수도로 삼았다.

          중국이 북경(뻬이징)을 수도로 삼게된 것은 금(金)나라 시대때 부터이다.
          이때부터 북경(뻬이징)은 1,000년 가까이 중국을 통치하는 수도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이다.

          2대 태종 때인1125년에는
          송(宋)나라와 동맹을 맺고 요(遼)를 공격하여 요를 멸망시키고 만주지역을 차지하게 되었다.
          금(金)나라는 송(宋)나라와의 사이에 불화가 발생하자 송(宋)나라 수도였던 허난성의 카이펑을 공격하여
          1127년 송(宋)나라의 상황 휘종과 황제 흠종 등을 사로잡고 송(宋)나라를 강남으로 밀어냈다.

          제8대 선종(재위 1213∼1223)은 1214년 몽골군의 공격을 받고 이를 피하여 도성을 뻬이징에서 카이펑으로 옮겼다.
          제9대 애종은 몽골, 남송 연합군의 추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자살함으로써
          금(金)나라는 건국 120년 만에 멸망하였다.

          여기서 금(金)나라를 세운 김 아골타(金 阿骨打) 라는 사람에 대한 역사적인 기록을 살펴보면
          금(金)나라의 역사를 다룬 《금사(金史)》를 보면 아래와 같은 역사가 기록되어 있다.

          金之始祖諱函普,初從高麗來,年已六十余矣。兄阿古乃好佛,留高麗不肯從.

          << 해석 : 금(金)나라의 시조인 함보(函普)는 원래 고려(高麗)에서 왔는데, 그때 나이가 60이 조금 넘었다.
          그의 형(兄) 아고(阿古)는 불교를 좋아하여 고려(高麗)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

          또 청(淸)나라에서 만든 역사책 인 <만주원류고 권7>에 나오는 내용을 보면

          新羅王金姓則金之遠派

          << 해석 : 신라왕(王)의 성씨인 김(金)이 금(金)나라의 먼 혈통이다. >>

          한국 사람인 김(金)씨가 중국에서 금(金)나라를 건설하여 중국인이 한족(漢族)을 지배하였는데,,,
          이것도 자기들 역사라고 ???
          하기야 피지배계급으로써의 역사 이지만,,,, 역사는 역사이니까 ,,,,,,


        원(元)나라 ( 1271년 ~ 1368년 / 북원(北元) 1368년 ~ 1635년 )

          몽고족이 세운 나라

          1234년 금(金)나라를 물리치고 몽골족이 북쪽의 몽골고원에서 남쪽의 중국 본토로 내려온다.
          1271년 국호를 원(元)으로 바꾸고 북경(뻬이징)에서 중국을 통치하였다.
          1368년 중국 남쪽 만경에서 주원장(朱元璋)이 명(明)나라를 건국하고
          원(元)나라의 수도인 북경(뻬이징)으로 쳐들어 오자,
          원(元)나라의 토곤 테무르 임금은 만리장성 북쪽의 몽골고원으로 물러났다.
          몽고의 본래 근거지로 물러난 원(元)나라를 북원(北元)이라고 말하는데
          1635년까지 지속하다가 청(淸)나라의 공격을 받아 결국 멸망하게 된다.

          중국은 동북공정을 하면서 원(元)나라의 역사도 중국(中國)의 역사라고 우긴다
          이런 원(元)나라의 역사가 중국의 역사인가 ??
          원(元)나라의 역사가 자기들 중국(中國)의 역사라면,,,,
          자기들 나라(元)에서 자기들 민족(한족:漢族)을 왜 최하층계급으로 취급을 했는지 설명해야 한다.


        명(明)나라 ( 1368년 ~ 1644년 )

          몽고족이 세운 원(元)나라의 지배를 받았을 때 중국의 한족(漢族)은 최하층민이었다.
          원(元)나라가 쇠퇴하자,
          1368년 중국 남쪽지역을 평정한 주원장(朱元璋)이 난징(남경)에서 황제로 즉위하여 명(明)나라을 건국하였다.
          명(明)나라도 나중에 수도를 북경으로 옮긴다.

          주원장(朱元璋)은 군사를 이끌고 곧바로 힘이 없는 원(元)나라의 수도인 북경(뻬이징)으로 쳐들어 갔다.
          더이상 중국을 지배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원(元)나라의 토곤 테무르는
          수도인 북경(뻬이징)을 버리고 만리장성 북쪽의 몽골고원으로 물러났다.
          원(元)나라의 지배를 받았을 때 수많은 수모를 겪었던 한족(漢族)이 세운 명(明)나라 이지만
          만리장성을 넘어 원(元)나라를 쳐들어갈 힘과 용기가 없었던 것이다.

          명(明)나라는 만리장성까지 진군하고 만리장성을 경계선으로 그 남쪽을 차지하게 되었으며
          북쪽의 원(元)나라의 세력이 겁이나서 만리장성을 더더욱 견고하게 샇게 되었다.

          사실 중국에서 만리장성이 가지고 있는 의미는
          그 북쪽은 중국땅이 아니고, 중국은 만리장성 남쪽을 의미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명(明)나라를 세운 주원장(朱元璋)은 누구인가 ???

            해군 기지가 있는 진해에 가면 천자봉(天子峯)이라는 산이 있다.
            이 산(山)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다.

            옛날 천자봉 연못의 이무기가 용이 못 되어 마을 사람을 못살게 굴었다.
            이에 염라대왕이 이무기에게 용 대신 천자(황제)가 되라고 권하여 이무기는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그래서 염라 대왕은 이무기가 천자봉 연못 아래에 있는 마을의 주(朱)씨 가문의 아기로 태어 나도록 해주었다.

            주(朱)씨 가문의 노부부의 아들로 태어난 주원장(朱元璋)은
            어려서부터 총명해 5살 때 고승을 따라 절에 들어가 문무를 익혔고
            15살이 되었을때 벌써 장군으로 성장하여 중국으로 건너가서 명(明)나라를 세웠다고 한다.

            또 다른 전설은 태조 이성계의 아버지가 천하 명당을 찾아 전국 방방곡곡을 헤메다가
            천자봉(天子峯)의 명당자리를 찾았는데, 주(朱)씨 집안에게 빼앗기게 되었다.
            그래서 같은 시기에 태어난 후손 중에서
            주(朱)씨 집안에서는 주원장(朱元璋)이 중국에서 명(明)나라를 세워 천자(天子)가 되었고,
            이(李)씨 집안에서는 이성계(李成桂)가 조선(朝鮮)을 건국하여 왕(王)이 되었다.

            이성계(李成桂 : 1335 년 ~ 1408 년 )와 주원장(朱元璋 : 1328 년 ~ 1398 년 )은 7살 차이로 동시대 인물이었다.

            중국의 역사책에서도
            주원장(朱元璋)의 출생지를 정확하게 말하지 못하고 있다.
            주원장(朱元璋)은 걸식을 하며 돌아 다닐 정도로 매우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고,,,,
            어려서 절에서 생활하였다고 하며,,,,  
            중국에서 활동할 당시 주원장(朱元璋) 주변에는 유독 고려인(高麗人)이 많았고,
            주원장(朱元璋)의 부인도 고려인(高麗人) 이었다고 한다.

            주원장(朱元璋)의 출생지가 어디인지는 중국에서는 아직까지도 밝혀지지 않고 있다.
            대개 천자가 태어난 땅이 중국내의 어딘가라면 그 마을 사람들은 난리가 난다.
            천자가 출생한 곳이라 하여 자손대대로 자랑을 하기 마련인데
            중국내에서는 주원장의 출생지라고 말하는 곳이 없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주원장의 출생지가 전라남도 해남 마을로 전해 내려 오고 있다.


        청(淸)나라 ( 1616∼1912 )

          1616년 만주족(또는 여진족)인 누르하치가 만주지역을 통일하고,
          옛날에 여진족이 세웠던 금(金)나라를 계승한다는 뜻에서 후금(後金)이란 이름의 나라를 세우게 되었다.
          그 후계자 홍타이지는 국호를 청(淸)으로 고치고 주변 각국을 침공하여 영토를 확장하였고,,,
          홍타이지의 다음에 즉위한 순치제(順治帝) 때 명(明)나라 수도였던 북경(베이징)을 점령하고 수도로 삼았다.

          1대 임금이었던 청태조 (淸太祖) 누루하치의 이름을 보면
          성(性)이 애신각라 ( 愛新覺羅 ) 이고 이름(名)이 노이합적 ( 努爾哈赤 )이다
          2대 임금 이었던 청태종 (淸太宗) 홍타이지의 이름을 보면
          성(性)이 애신각라 ( 愛新覺羅 ) 이고 이름(名)이 황태극 ( 皇太極 )이다.

          청(淸)나라의 임금의 성(性)이 애신각라 ( 愛新覺羅 ),,,,
          본래의 만주어의 발음은 < 아이신 교로 > 라고 하는데,
          <아이신> -- 애신( 愛新 )의 뜻은 김(金)이고,,,,,, <교로> -- 각라( 覺羅 )의 뜻은 씨(氏) 이라고 한다.
          즉 < 아이신 교로 > -- 애신각라 ( 愛新覺羅 )는 김씨(金氏)라는 뜻이다.

          또 한자의 뜻 글자로 풀어 보아도
          애신(愛新)-- 신라를 사랑하고,,,,,, 각라(覺羅) -- 신라를 잊지 말자 라는 뜻이다.

          영토로 본다면 원(元)나라의 영토가 가장 넓었고, 다음이 청(淸)나라이다.
          청(淸)나라는 역사상 가장 큰 영역을 차지하게 되었다.
          이것이 오늘날 중국(中國)영토의 기본이 되었다.

          청(淸)나라는 역사는
          중국의 한족(漢族)이 분명히 만주족의 임금의 지배를 받은 시기이다.
          이런 청(淸)나라 역사를 자신의 역사라고 자랑하는 중국 사람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
          혹시 바보 아닐까 ??


        결론

          중국의 역사를 BC 3500 년경에 시작된 삼황오제로부터 라고 생각한다면
          지금까지 약 5,500년 역사를 가지고 있는 셈이다.

          이 중에서 중국인 ( 한족 - 漢族 )이 임금을 한 시기는 다음과 같다.

            (1) 한(漢) 나라 ( BC 206년 ~ AD 220 년 )  ----------------- 약 425 년
            (2) 송(宋) 나라( 北宋 : 960 ∼ 1127 / 南宋 : 1127 ∼ 1279 ) --- 약 319 년
            (3) 명(明) 나라 ( 1368년 ~ 1644년 )  ---------------------- 약 275 년

            합하면 1,000년 정도 된다.


          5,500 년 중국 역사속에서 한족(漢族)자신들이 중국의 주인(임금) 노릇을 한 것이 고작 1,000년이고
          나머지 4,500 년 기간은 다른 민족 ( 동이족, 선비족, 거란족, 여진족, 몽고족, 만주족 )의 지배를 받았다.
          결론은 간단하다.
          중국의 역사는 지배 계층의 역사가 아니고 피지배 계층의 역사이다.

          이것을 속일려고 들고 나온 것이 --- 동북공정(東北工程)
          하지만 중국사람들의 자존심 때문에 정부차원에서 만든 이 동북공정(東北工程) 때문에
          중국은 스스로 파멸의 길을 가고 있는 무덤을 파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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